막0822to26 -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마가38).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8장 22-26절
전에 제가 저희 집 아이 안경을 맞춰주기 위해서 안경점에 동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과를 들러서 시력을 검사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안경점에 맡기고는 안경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안경점 점원과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 점원이 요즘 아이들은 70-80퍼센트가 안경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아이들이 TV를 많이 보고 컴퓨터를 많이 해서 그런가요?”라고 했더니 “아닙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멀리 보지를 못합니다. 높은 건물들에 시야가 가려서 먼 곳을 보았다고 가까운 곳을 보았다가 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되니 시력이 나빠집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때 문득 몽고사람들의 시력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몽고사람들은 정반대입니다. 몽고 사람들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녹색 평야를 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주 멀리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다 보니 보통 3.5이고 5.2나 심지어는 7.0이나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거의 독수리 수준의 시력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들은 10미터 밖에 있는 버스번호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은데, 몽골에 사는 사람들은 수 십리 밖에서 밥 짓는 증기까지 볼 수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똑같은 눈이라도 같은 눈이라고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 그러니까 모든 것들을 현실을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떡에 대한 이야기로 알아들었습니다. 온통 떡, 그러니까 먹고 사는 문제와 현실에만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시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을 기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숨을 쉬시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벳새다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와서 그 사람을 좀 만져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시면 그 사람이 나을 것이라고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버려 두고 그 맹인의 손을 붙잡고 단 둘이 아얘 마을 밖으로 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그 맹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또 침입니다. 예수님은 예전에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처럼 이번에도 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손을 얹고 안수하셨습니다. 그 다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뭐 좀 보이는 것이 있느냐?” 그 사람은 잘 안 보이는 것을 보려고 애쓰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희미하게 사람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데 걸어다니는 걸 보니 사람인 것 같습니다.” 시력이 회복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사람인 것은 알겠는데, 형체가 분명하지 않아서 마치 나무가 걸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성경은 그가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져 주시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본문에는 정작 고침을 받아야 할 당사자의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맹인의 믿음에 대해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예수님 보시기에 이 사람의 믿음은 아직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이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간 일,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신 일, 두 번씩이나 안수하신 일들을 이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라고 이야기하는데 저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서 믿음의 씨앗을 발견하기는 하셨지만 그 믿음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가끔씩은 믿음이 정말 일취월장 자라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그런 식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더 강해지고 더 확실해 지고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게 대부분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자라난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그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때로는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던 맹인처럼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방향을 모르고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와서 뒤돌아 보면 믿음이 그만큼 성장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은 믿음의 씨앗이라도 있으면 그 씨앗이 나무가 될 때까지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의 구석 구석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 주셨고,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이 정도의 믿음이라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은혜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셨던 주님은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도와주실 것이고 더 큰 믿음, 더 든든한 믿음이 되도록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첫째로 우리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더해주시려고 우리의 삶을 터치하실 때, 그 손길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손길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더 나은 신앙으로 가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주님이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믿음을 향해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작은 놀라움이 찾아왔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영혼에 침을 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냥 넘겨버리면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겠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과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터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방향으로 더 다가간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회복될 것이고 더 크고 확실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만져 주실 때, 그 만져주심을 잘 알아차리시고 그 분의 손길을 거부하지 마시고 꼭 그 분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붙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맹인을 고쳐주신 것은 그에게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말 한 디로 고쳐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치료하셨고 또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에 나누어서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질병을 치료해 주셨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이 사람의 눈을 고쳐주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사실 예수님에게는 더 어렵고 더 쉬운 것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자주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신다든지, 혹은 필요 없는 일을 하시는 것 같을 때, 예수님의 행동에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와 은혜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그것을 찾아서 우리의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지방을 떠나시기 직전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하실 수 있는 일을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행하셨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또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대셨고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서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닮아있는 것은 주님께서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이야기가 실은 같은 맥락에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직전에 벳새다로 건너오는 배 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안타까워 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당시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고, 또 귀가 있어도 듣지 못 하는 상태가 그 당시 제자들의 영적인 현주소였습니다. 그 두 사람의 상태를 합쳐놓은 것이 영적으로 보면 그 당시 제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사람들, 그리고 입으로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방법은 단 하나 예수님께서 고쳐 주셔야 합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주듯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만들어 주셨듯이 새롭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 은혜에 소망이 있고, 그 은혜에 기대를 걸면 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 또한 영적인 입과 귀가 열려야 하고 또 눈도 뜨여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이 고쳐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만들어 주시고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둘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것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눈을 떠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해지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우리가 제자들처럼 그렇게 눈 멀어 있다면 그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데, 다시 볼 수 있는 치료방법을 아는 의사가 딱 한 사람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의사가 어디에 있든지 기를 쓰고 찾아가겠죠? 가서 만나줄 때까지, 그리고 치료해 줄 때까지 그를 붙들고 놓지 않겠죠?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눈을 뜨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열정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스스로 그 방향을 모르고 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면 여러분은 본문에 나오는 맹인처럼 아는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목회자가 될 수 있고, 또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좋은 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도움을 받아서라도 우리가 꼭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기독교 초기 신앙의 선배들과 청교도들의 책들을 읽다가 굉장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저 이 분들이 아무래도 현재의 개혁교회의 초석이 되신 분들이라 적어도 이런 분들의 사상을 조금은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이 분들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이 분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어떤 공통된 것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그것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공통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영광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제가 감조차 잡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 하며, 만족해 하고 또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고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아주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구나. 나는 보지도 못하는 것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능력있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구나.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 멀어 있구나!’ 그래서 그 때부터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것들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그런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 걸음씩 앞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수년이 지난 후에는 어렴풋하게나마 그게 뭔지 알게 되었고, 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두 가지가 제 신앙의 기둥이 되어가고 있고 또 소망과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것이 더 확실해 지는 때가 오면 여러분에게도 나눠드리려고 하는데, 아직은 준비가 덜 된 듯 해서 더 찾으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누구도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그 전부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완전한 시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어느 부분인가는 전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그 부분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런만큼 우리의 신앙은 더 신나고 행복하고 능력있는 신앙,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이 어디인지 헤아리시고 꼭 그것을 주님께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주변의 도움을 받으시면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어야 합니다. 꼭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혼의 눈을 온전하게 뜨는 일은 어느날 갑자기 단 한 번에 모두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맹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눈에 보였던 것은 마치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걸어다니니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 만약에 그 그 사람들이 서 있었다면 그 맹인은 그저 나무가 보인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안수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때야 비로소 맹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것을 기대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눈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조금씩 조금씩 회복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시력입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면 스스로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고, 세상을 보는 눈도 전혀 달라지고 완전해 진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갑자기 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을 보면 굉장히 단정적으로 말하고 지시적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건 처음 눈을 떠서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이지 아직 완전히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2개월이 지나면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3-4개월이 되면 색깔을 분간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의 시력이 0.03에서 0.05쯤 된다고 합니다. 5개월에서 7개월쯤 되면 멀고 가까움, 그리고 입체감이 생기기 시작하구요. 8개월에서 12개월이 되어야 시력이 0.1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른의 시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5세에서 6세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기가 뭐라도 보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2개월 부터입니다. 그렇지만 아기는 1년이 되어도 사실 모든 것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먼 곳에 있는 것은 뿌옇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시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시작은 시작입니다. 결코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아기에게는 자기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것이 세상의 전부도 아니고 또 진짜 모습도 아닙니다. 완전치 못한 눈으로 뿌옇게 바라보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더 잘, 그리고 제대로 보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시력을 회복해 가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성장도 이렇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적인 시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다가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낙심하여 실패하고 여전이 뿌옇게만 보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는 일, 그래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되고, 뿌옇게만 보이던 것이 확실하게 보여지게 되는 것은 시간과 애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다시 만져 주시는 지속적인 은혜가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시력을 제대로 회복하려면 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참아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영적으로 확실한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정도의 영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보기는 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믿는 순간 눈이 뜨여졌으니까요. 그렇지만 보고 있다고 다 똑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볼 수 있는 것이 다 같은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잘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뿌옇기만 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가장 뚜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막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삶의 기쁨과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 생각에 너무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나라에 대한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은 달리 표현하면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어져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져야 하며 뿌옇던 것이 분명해 져야 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점점 많아져야 하며 또 그렇게 볼 수 있게 된 것들은 더 뚜렷하게 보여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 신앙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확고해지며, 기쁨으로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청년부 성경공부가 조금씩 재미있어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청년들이 이제 조금씩 영적인 눈을 떠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적어도 신앙 안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조금씩 거기에 관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현실 때문에 그 관심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진지하게 믿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청년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더 놀라운 믿음의 세계를 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청년들에게 부탁합니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믿음의 눈을 다시 닫아버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이거구나!’할 때까지는 계속 눈이 열리는 은혜를 위해 기도하면서 모임이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께서 뜨게 하신 영적인 눈의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확실해지고 그래야 신앙생활이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어디까지 회복되어야 할까요? 그 답은 25절에 있습니다. “그가 주목하여 보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우리의 영적인 시력은 여기까지 회복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밝히 보는 수준까지,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놓치지 않고 다 볼 수 있는 수준까지, 우리 삶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11장 1절은 그것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은 지금 나의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면 보입니다. 그냥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소망하는 것이 실제가 되고 현실이 됩니다.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내가 믿는 것이 확실하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됩니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이 가지는, 그리고 영적인 시력이 가지는 능력입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이지만, 믿음은, 영적인 시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장 확실히 보고 또 믿게 만들어 줍니다. 불확실함 때문에 모두가 다 두려워 떠는 이 세상에서 이런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의 답답함과 불확실함은 우리의 상황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또 보더라도 뿌옇게만 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새롭게 보여진 것들이 더욱 더 선명해 지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손을 끌고 계시며 우리의 영혼의 눈에 침을 발라주고 계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인내하십시오. 때가 되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보이는 것들이 더 뚜렷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뚜렷이 보며 밝고 확고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달라져야 신앙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삶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그렇게 새로 보이게 된 것들이 확실히 보여지기 시작할 때, 믿음을 통해 이 세상과 나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신앙도 삶도 가장 밝고 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영혼의 눈을 뜨는 복을 주셔서 그 눈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또 나 자신의 삶을 확실히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또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