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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8.21. 새벽예배 - 홍수 후에 노아가(창세기 37)

창0919to29 - 홍수 후에 노아가(창37).pdf


20130821D (#01).mp3.zip




  문 : 창세기 9장 18-29절


홍수가 그치고 충분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노아는 주로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복을 주어서 좋은 소출을 많이 거두어 들이게 되었습니다. 홍수 이후라서 환경도 많이 바뀌고 처음 짓는 농사라서 걱정도 되었을텐데 풍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럴 때, 이렇게 풍요롭고 평화로울 때 조심해야 하는데, 노아는 이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 노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기록만으로 보면 오히려 죽지 않고 승천했던 에녹보다도 더 훌륭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자신의 신실함을 끝까지 지켜내고 승천했지만, 노아는 그런 훌륭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 되는 엄청난 역할을 감당했지만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기록하고 있는대로 다른 죄인들과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것은 아마도 노아가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서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 몸을 가렸다고 되어 있는데, 노아는 포도주에 잔뜩 취해서 자신의 몸을 다 드러낸 채로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노아의 모습을 술에 취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각조차도 무뎌져 버린 죄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 애석한 모습입니다. 실제로 성경만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것이 노아가 드러나게 잘못했던 유일한 모습이었고, 이것 때문에 더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하지 못했던 것이니까요. 평안한 때에 너무 풀어지면 사탄이 틈을 타게 됩니다. 영적인 긴장을 늦추게 되면 무언가에 취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지켜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일수록 긴장이 늦춰지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이런 모습을 둘째 아들인 함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나가서 나머지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서 가만히 아버지를 덮어주었습니다. 원래 두 사람이 했던 일은 함이 해야만 했었던 일입니다. 함은 아버지가 그렇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리는 대신에 자신이 아버지를 덮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나가서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합리화 해도 좋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과 부끄러운 모습을, 그것도 자기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리는 일은 요즘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잠에서 깬 노아는 그 모든 사실을 알고서 함은 저주하고 셈과 야베스는 축복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해서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 저주와 축복이 노아가 잠에서 깨어나 사실을 알게된 직후에 벌어진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아버지들, 특히 노아와 같은 창세기의 족장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누구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함을 저주하고 나머지 아들들을 축복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함이 행한 일은 굉장히 좋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함을 저주한 것은 그 일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함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가나안 족속들이 가지게 될 미래의 죄악된 모습을 보았고, 그런 죄악의 결과를 미리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가나안의 자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다 그 저주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아나안 족속들 중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이켰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라합인데, 이 사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정통 유대인들도 누리지 못한 영광입니다. 또 그렇게 보면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모조건적이고 고정된 복을 약속받았고 그 약속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본다면 저주받고 복을 잃어버린 삶을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을 주시고 주지 않으시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을 모양의 삶이 있고 그렇지 못할 모양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복을 억지로 빼앗는다는지,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 먹듯이 복을 받을 수는 없지만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가까이 갈 수는 있고, 그렇게 복을 받을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노아와 노아 가족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 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노아가족 이야기는 그렇게 좋기만한 메세지를 전해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노아도 잘못했습니다. 함도 잘못했습니다. 평안한 때라고 너무 느슨해져서 자신이 죄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나, 다른 이들의 죄와 부끄러움을 구설수에 올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죄와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모습들입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은 죄와 죄인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셈과 야벳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영적인 긴장이 느슨해져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구설수에 올리거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시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의 죄를 가려주었습니다. 그가 더 부끄러워지는 것을 방지해 주었습니다. 


죄는 항상 하나의 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노아의 죄가 함의 죄로 이어졌고 그래서 노아 가족의 역사에 그림자를 드리웠듯이 죄는 항상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퍼뜨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암세포 처럼 말입니다. 죄의 이러한 전염을 막는 방법은 죄에 대해서 죄악된 방법, 인간적인 방법인 반응을 보이는 대신에 그 죄를 가려주기 위해서 힘쓰고 또 그 죄 때문에 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으로 악을 이길 때, 죄는 힘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아담의 후손이고 또 노아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도 죄로 기울기 쉬운 경향이 있고, 또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을 비난하고 더 부끄럽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경향을 막을 수 있는 방법, 그래서 더 이상 죄가 득세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 영적인 긴장을 풀지 않고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해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저주가 아닌 복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노아나 함이 아니라 셈과 야벳을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영적인 긴장을 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가까이 머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