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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9.08.주일오전 -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마가복음42)



막0914to29 -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마가42).pdf


20130908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9장 14-29절



서울에 있는 어떤 교회는 한 때, 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숫자가 60만이라고 이야기 되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성도들인지라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마어마한 숫자뿐만 아니라 그 은혜로운 분위기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숫자가 예배를 드리다 보니 참 아이러니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대예배실에서, 그것도 좋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시간마다 성도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차를 빼는 일 때문에 서로 큰 소리가 오고 가고 다툼이 일어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러니 예배 자체는 뜨겁고 은혜로웠는지 몰라도 그 예배를 앞뒤로 둘러싼 시간들이, 특히 예배를 마치고 난 직후의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시간이 되고, 심지어는 예배를 드리기 이전만도 못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주차공간이 부족한 대형교회들은 이런 일이 그렇게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가정 안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큰 은혜를 받고서 기쁘게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 은혜가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아이들이 집구석을 악마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사는 다시 악마가 됩니다. 3박 4일 동안 교회에서 부흥회를 합니다. 정말 하늘나라에 다녀온 것처럼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내와 별것 아닌 일로 한 판 붙습니다. 기도를 하느라 조금 늦게 들어가니 남편이 꼬투리를 잡아 테클을 겁니다. 그러면 3박 4일간의 은혜는 온데 간데 없고 예전처럼 씩씩거리며 서 있는 자기 자신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무런 저항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들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은혜를 지켜내려는 우리의 노력들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현실은 항상 만만치가 않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고, 또 우리의 은혜를 깨뜨리고 빼앗아가려는 여러가지 장애물들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겨내면서 우리의 은혜를 지켜내야 합니다. 이것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조건이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며 또 은혜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직접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던 제자들은 그냥 거기 눌러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눈 앞에 예수님만 놓아두시고 그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만약 그 때 이 찬송이 있었다면 제자들은 투덜 투덜 이 찬양을 부르며 산을 내려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나머지 제자들에게 심하게 귀신들린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아마도 이미 전도실습을 할 때, 예수님 없이도 귀신들을 내쫓았던 제자들은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며 귀신더러 “나가!”하고 자신있게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거듭 거듭 똑같이 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호재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도 없으니 제자들은 그들의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을 비난하면서 말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또 제자들은 수세에 몰려 있으면서도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끙끙거리며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산 아래에서 예수님과 세 사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 특별히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다 아셨지만 물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거기 모인 사람들과 나머지 제자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깨닫게 하시고 또 책망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싸웠을 때, 부모들이 다 알면서 “너희들 도대체 무엇가지고 그렇게 싸우냐?”라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지만 대답은 그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되돌아 왔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또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래 대답은 제일 당당한 사람이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선생님 제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린 제 아들을 선생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귀신은 한 번 발작을 일으키면 그 때마다 제 아들을 거품을 물고 쓰러지게 만들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갈만큼 악한 놈이기 때문에 선생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계시지 않더군요.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자신있게 달려들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은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제자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군중들, 그리고 그 아버지를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한 아이가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거의 죽음 일보직전까지 갈 정도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수많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라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요? 하나님께 매달려야죠. 저 아이를 살려달라고, 고쳐주셔야 한다고 들어주실 때까지 간구해야죠.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는데 실패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 실패를 빌미로 제자들에게 말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그저 그런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었습니다. 또 아이의 아버지는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구구절절히 그런 상황을 늘어놓으며 아들의 상황이 심각한 탓, 그리고 제자들의 무능력한 탓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 속에서 예수님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면 논쟁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다느니, 이 상황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느니, 나는 잘못이 없고 너에게 잘못이 있다느니, 네가 틀리고 내가 맞는다느니... 객관적인 분석과 잘잘못을 가리는 일에 몰두합니다. 아니면 그저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합니다. 아니면 그 일의 당사자이면서도 남의 탓만 하느라고 구구절절히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들어보면 이런 반응들은 저마다 그럴만한 것들입니다. 일이 벌어졌으니 원인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야하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 너무 깊숙히 개입하면 안되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반응들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괜챦습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이런 모습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만들어낸 반응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모든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굉장히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또 심하게 나무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다는 것,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하고 똑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굉장히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이 그렇고, 객관적인 데이터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꼭 정해진 반응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수를 믿는 믿음은 위대한 믿음입니까? 그저 그런 믿음입니까?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믿음의 위대함은 상식적인 반응이 아닌 전혀 다른 반응을 만들어 낸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반응을 통해서 그 상황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도록 만든다는데 있습니다. 


무리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문제의 근원, 그 모든 불신앙의 혼란을 만들어낸 그 문제의 근원이 되는 아이를 주님께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주님이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계속해서 실패하게 하는 일들, 우리를 계속해서 좌절하게 만드는 일들, 끊임없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가져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자기 힘으로 안된다고 불평만 하거나 아얘 포기하거나 아니면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그런 일들에 대해서 이리 저리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만 하는 냉소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믿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믿는다면 주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잠시잠깐 믿음 없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빨리 믿는 사람답게 예수님께로 가져다 드려야 합니다. 


이제 아이는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께 오자 마자 최후의 발악을 했습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심각한 발작을 일으킨 것입니다. 증상은 같았지만 훨신 심각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우리는 왜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그렇게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처음에 어려움이 생겨나면 처음에는 대개 잘 참아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이 너무 오랫동안, 그것도 개선되지 않고 심지어 악화되기 시작하면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포자기하게 되고 무기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자신과 직접 관련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저는 진짜로 이런 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구에 온 다음 해인가 어떤 집사님께서 어렵게 얻은 아들이 돌도 지나기 전에 백혈병에 걸려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요? 여러차례 병원에 들러서 기도도 해 주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부모들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게 변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자기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전혀 간절해 보이지 않고 마치 옆집 강아지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아이의 아버지 되시는 집사님은 아이가 계속 치료를 하는데도 차도를 보이지 않고 또 원인모를 감염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기만 하자 “뭐 살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제가 화가 나서 막 따졌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아들 아니냐고 무조건 고쳐야지 무슨 소리냐고 거의 소리를 지르다 시피하면서 나무랐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제 충고대로 급하게 헬기까지 동원해서 서울 삼성병원으로 아이를 옮겼습니다. 가자 마자 감염의 원인을 찾아서 치료가 되었고, 골수이식을 받고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몇 년 전에 그 집사님 가족을 우연히 식당에서 만났는데 그 때 일을 기억하시고는 저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오셔서 저도 궁금해 하던 차에 부쩍 자라있는 그 아이를 보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일인데도 안되는 이유만 늘어놓으면서 별로 간절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던 것 또한 그래서 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 앞으로 온 아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악화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더 실망하고 좌절하게 만들었고, 그나마 있었던 믿음마저도 흔들어 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건 이런 말이었습니다. “전 이제 다  포기했습니다. 뭐 저 아이가 고쳐지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 건데 만약에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주세요. 안되면 말구요.” 예수님은 정색을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다면 이라니?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물론 이 말은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는 애초에 그런 내용은 없으니까요. 이 말은 믿음이 불가능이라는 자물쇠로 잠긴 모든 문을 열어놓는 열쇠가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한 일의 영역에 속한 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불가능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가능, 불가능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시면 될 것이고, 하지 않으시면 안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맡겨버립니다. 선하신 아버지이시니 가장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어집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번개처럼 아이의 아버지의 불신앙을 깨웠습니다. 이 말씀에 아버지는 잃어버렸던 믿음을 되찾고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굉장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해 놓고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믿기는 믿습니다.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 믿음이 너무 너무 부족합니다. 때로는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부족합니다. 세상에 자기 믿음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얘 믿음이 없는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자신에게 믿음이 있어도 그 믿음이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는지를 잘 압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다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니까요. 그래서 소리지르게 됩니다.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놀라운 점이며, 또 기도 자체가 은혜인 이유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십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 믿음이 턱없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없는 것 같은 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도움을 청하게 해 줍니다. 종종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가 안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제가 사용하는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그럴 때는 억지로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기가 힘들다고 기도드리고, 기도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시라고 말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통로인지, 하나님은 믿음이 없다고 기도드리면 믿음을 주시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기도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런 점에서 이 외침보다 더 훌륭한 기도, 더 정직한 믿음의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 외침 속에는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믿음이 없는 그것까지도 도와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들어 있으니까요. 이제 주님은 슬슬 움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자 그야 말로 귀신은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서 계속 그 아이 안에 남아있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귀신은 그 아이를 거의 죽은 것같이 만들어 놓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믿음이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진짜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끝난 것입니다. 혹을 떼러 왔다고 오히려 혹을 붙인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아이가 이렇게 죽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시니까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끝을 선언합니다. 쉽게 포기합니다. 제가 그랬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저는 요즘 문득 문득 내가 예전보다 훨씬 끈질겨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같으면 이미 포기했을 일을 여전히 그것도 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것을 보니까요. 사실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쉽게 표현해서 ‘그냥 있는 것’입니다. 포기다 뭐다 거의 생각하질 않습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죠. 그런데, 이런 변화는 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끝이 없으신 분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낸 변화입니다. 제가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서 부터는 하나님이 이제 끝이다라고 선언하지 않는 한, 적어도 그렇다는 확신을 주시지 않는 한 내가 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더니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27절에서 ‘일으키셨다’는 단어는 ‘부활하게 하셨다’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또 ‘일어서니라’라는 단어도 ‘부활하다’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27절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부활시키시니 이에 부활하니라”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시며 부활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생명으로 일으키십니다. 야이로의 딸처럼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아이는 그 날 단순히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에 사로잡혀 살아있어도 죽었던 것 같은 자리에서 새 생명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게 끝이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비참함이 아니라 새 새명을 얻어 온전하게 되는 것! 이것이 주님이 생각하신 끝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직접 끝을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끝이라고 이야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 조차도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참된 성도들 중에서 그 인생이 해피엔딩이 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려움이라고 하더라도 하늘영광이라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일을 여러분의 육안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결코 끝이 아닙니다. 거쳐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믿음만 지킨다면 우리의 끝은 영광스러운 해피엔딩이 될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는 주님이 끊임없이 우리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고 다시 서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쫓는데 실패한 제자들은 창피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분명히 했던 일을 이번에는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그 연유를 조용히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우리는 그 귀신을 내어쫓지 못했습니까?” 돌아온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를 기도가 없었거나 혹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으시고 그냥 귀신을 내쫓았기 때문에 기도 자체에 무슨 부적이나 주문같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실 이 말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말은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누가 기도할까요? 누가 진짜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있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또 누가 기도할까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나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진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런 종류는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런 종류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받기를 원하고, 또 은혜받은 자리에만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쁜 소원은 아니지만 그런 소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산 아래로 인도하시며 그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살며 일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살며 또 다른 이들을 섬기며 복잡한 현실 속에서 은혜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러나 나의 힘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겸손함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실패해도 기도하시고 낭패를 당해도 기도하십시오. 복잡하고 피하고 싶은 현실 속에서도 기도하십시오. 다 끝난 것 같아도 내 눈을 믿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다시 기도하십시오. 믿음이 없어 낙심될 때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쳐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모든 것을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져가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 믿음의 기도를 마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과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개입하실 것이며 기도를 통해서 힘있게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과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