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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9.22. 주일오전 -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마가복음 44)



막0938to50 -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마가44).pdf


20130922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9장 38-50절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호본능이라고 하죠. 이 보호본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이 보호본능이 없다면 앞에서 차가 달려와도 피하지 않을 것이고, 정면에서 공이 날아와도 그냥 눈을 뜬 채로 얻어맞게 될 것입니다. 내 생명은 물론 내 가정이나 국가까지도 유지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또한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우리에게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교회를 지키려는 보호본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필수적인 것이 보호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라고 이러한 보호본능도 도를 넘게 되면 사람을 굉장히 일그러진 모습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어떤 일을 처리한 것에 대해서 보고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얼핏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고 또 잘 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자들이 이런 행동을 했던 이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굉장히 우스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마자 심하게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고쳐주셔야 했죠? 그것은 제자들이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해 놓고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앞뒤가 맞지않는 일을 했던 것은, 요한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제자들 자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inner circle에 속한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그 당시 스타중의 스타였던 예수님과 그런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 일종의 특권이요 권력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것을 함부로 침범하는 다른 사람들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은 자기들 전체를 일컬어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지난 주일 본문을 돌이켜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도, 그 가르침에는 귀를 닫아버린 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서로 다투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들만 가지고 있는 특권을 침해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을 만나자, 한통속이 되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결코 하나가 된 적이 전혀 없었지만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일 때에만 완전히 한 마음이 되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모습을 닮은 모습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너무 쉽게 이합집산하는 세상을 닮은 모습입니다. 요한의 보고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왜 서로 높아지겠다고 서로 싸워대던 제자들이 이 일에는 이렇게 쉽게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는지를 간파하셨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만 높아지려는 욕심이 꿈틀대고 있었고, 이번에는 그저 그런 욕심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 열 두명이라는 작은 원,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좁아터진 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으면서도 자기들 속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으로 움츠러 들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갇혀있는 그 작은 원을 넓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원부터 시작하기로 하셨습니다. 그 지점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은 그 사람이 열 두 제자라는 원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뒤집어 버리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근거를 대시면서 그 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 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은 훨씬 더 큰 원 하나를 그리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아주 큰 틀에서만 똑같고 나머지는 우리와 많이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도 우리 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고 또 적용해야만 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적어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들 모두를 우리 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여도 우리가 절대로 이렇게 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단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우리의 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원 안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단만 아니고 영적으로 위험하지만 않다면 우리는 우리와 완전히 같지 않아도 우리 편으로 여겨야 합니다. 반대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일단 내 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똑같지 않아도 예수님이라는 원 안에만 있다는 것만 확실하면 그 사람은 우리 편이고, 더 크게 보면 우리를 돕는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를 핍박하지만 않아도 그 사람은 우리 편입니다. 이렇게 보면서 계속해서 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를 할 때는 반드시 이런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자꾸 나누게 되고, 내가 복음을 전해야할 그 사람들까지도 정죄하고 미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전도를 받아들이면 좋은 사람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면 무한정은 아니질지라도 우리 바깥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꾸 마음의 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좁은 원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고, 제자들처럼 그 좁은 원을 지키느라고 다른 사람들을 몰아내는 일을 그만둘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첫번째 원이 아주 멀리 있는, 어찌보면 제자들과 상관이 거의 없는 사람들로 그려진 원이었다면 두번째 원은 제자들과 조금 더 가까워진 원입니다. 그 원은 바로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물 한 그릇을 대접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원입니다. 제자들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완전히 복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귀하게 보고 계시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아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의 상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눈에는 이런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이 귀한 백성들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신앙의 성숙도는 정말 겉모습이 다른 만큼이나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것이 우리에게 서로 다른 원을 그리고 또 서로를 구분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주로 이런 구분을 하는 쪽은 항상 미숙한 쪽이 아니라 자신을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래도 신앙이 바로 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볼 때, 마음에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겨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죄를 하게 되기도 하고 또 무시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한 마디 하다가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구요. 그러나, 우리의 이런 감정과 태도는 당연한 것도 아니고 또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이 바로 서 있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지게 되는 마음을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셨고 또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오셨다면 저만 해도 결코 오늘 이 정도의 믿음이라도 지니고 사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쉽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을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려 오셨는지, 지금도 얼마나 인내하고 계신지를 생각하면서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아직은 미숙해 보이고, 아직은 부족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아직 믿음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다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적극적이라고 해서 주님께 대해서 소극적인 사람들과 다른 원을 그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더 성숙해져 있고, 내가 더 헌신적이라고해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원 안에 있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자꾸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기려고,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셨던 그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 눈으로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모르게 그려지는 원들을 더 넓게 만들고 또다시 생겨나는 원의 경계를 지워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손을 대신 원은 제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원이었습니다. 그 원은 바로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작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원에 대해서 특별히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42절부터 48절까지 무려 7절이나 됩니다. 열 두 절 본문에서 일곱 절이나 된다는 것은 이 부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그 내용도 얼마나 강경한지 모릅니다. 설마 예수님께서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정말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 하나를 실족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육신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이 작은 성도 하나를 실족시키면 손을 잘라 버려라.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런 역할을 하면 차라리 그 부분을 잘라버려라. 그렇게 하지 않아서 온 몸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그 부분 없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 물론 주님은 진짜로 그렇게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야기하는 이 잘못이 그만큼 심각한 잘못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말에서 실족한다는 말은 발을 헛딛어 넘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흔히 이 말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험에 들게 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서 낙심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이 말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뜻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죄 짓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말할까요? 말이라는 것은 항상 그 말이 주어진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그 말의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본문의 ‘실족’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 또한 오늘 본문이라는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을 몰아냈던 제자들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실족이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실족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요즘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예전에 제 나이쯤 되는 남자들은 군대에 갔다오면 그 이전과 비교해서 바뀌는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바뀌는 것이 바로 말투였습니다. 멀쩡하던 놈들이 군대만 다녀오면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가 섞이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망가져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군대는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저열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까요? 그것은 군대의 문화와 풍토 때문입니다. 군에 입대하고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고서 자대로 가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그런 말을 사용하니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서 한참을 지내다 보면 의례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말이 그렇게 망가져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족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문화 때문에 그 문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저절로 그 잘못된 문화에 젖어들어 똑같은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말입니다. 


제자들이 안으로는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경쟁하며 다툽니다. 또 외부적으로는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을 원 밖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처음 모습이었다면 새로 교회로 들어오는 성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선 사람들, 주도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본다면 뒤따라 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선 사람들을 흉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있는 사람들처럼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자기들이 새롭게 만들어 놓은 원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봉쇄하려고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란 의례 그런 곳이라고, 그래도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실족이라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하게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어떤 모양으로건 경쟁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경쟁은 어떤 의미에서건 순위를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쟁에 의해서 순서가 정해지면 우등생들은 교만해지고 열등생들은 열등감과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교회 구성원 간의 상처를 만들고 반감을 만들어 서로 진실로 마음을 열어 사랑할 수 없도록 방해하며 작은 틈을 점점 벌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경쟁으로 세워지고 경쟁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소명과 은혜로 세워지고 또 유지되는 곳입니다. 우선 소명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명이라는 것은, 그것이 교회라는 틀 안에서 주어질 때가 굉장히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과 나 자신 단 둘 사이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고 나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할 뿐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열심이라느니 또 나는 누구보다 그렇지 못하다느니 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누구와 누구를 비교해서 점수를 매기고 등수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그리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서 맡기신 삶을 살고 또 맡기신 역할을 감당했느냐 하는 것만 보십니다. 주님은 심지어는 결과도 보지 않으십니다. 그 과정만 보십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점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경쟁할 필요도 없고, 경쟁을 해서도 안됩니다. 그게 오히려 우리의 점수를 깍아먹게 될테니까요. 


또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 은혜 덕분에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또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하나님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최선을 다해서 은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로 묶여 있고 모여있는 이 교회 자체가 그 기초를 잃어버린 곳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은혜로 바라보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 없이 너그러우면서도 교회의 다른 지체들을 향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은혜가 아닌 율법의 잣대로 보게 될 때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엄격하기만한 잣대를 가지고 나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곳이 있다면 나는 그 곳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또한 이런 생각도 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평가하듯이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 또한 나를 그렇게 내려다 보며 평가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은혜로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볼 때, 함부로 평가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은 분별하지만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또 인내하게 됩니다. 재판관이 피고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부모가 아직은 미숙한 자녀를 바라보는 눈으로 그렇게 모두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서로를 향한 경쟁심이 남아있고 그래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느껴지신다면 이제는 그 마음을 꼭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앞에서, 나를 정죄의 눈초리가 아니라 은혜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눈을 닮아가시며, 그 눈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보다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조금 난해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 두 개의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처럼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소금이 맛을 잃게 되듯이 제자들 또한 제자로서의 ‘맛’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천덕꾸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제자들을, 그리고 교회를 맛을 잃은 소금처럼 만들까요? 바로 경쟁과 그 경쟁이 만들어 내는 특권의식입니다. 이게 끼어들면 교회는 그 본연의 맛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성도들도 그렇고,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한국교회는 이미 심각한 정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들 본연의 짠 맛, 그 소중한 맛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방법이 오늘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마지막 한 문장 속에 숨어 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이 말씀으로 돌이키고 이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경쟁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도 막을 수 있고, 이미 잃어버린 맛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머리 속에 그림으로 그려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 우리들 사이에 소금을 둡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때, 한 가운데 소금을 둘까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할 때입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 서로 서로 소금을 건내주고 건내 받습니다. 그리고 그 소금이 그들 한 가운데 있다는 말은 거기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금을 독점하지 않고 서로 서로 나누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절대로 서로 경쟁하고 다투며 줄서기를 해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너희는 항상 함께 모여서 즐겁게 음식을 나누어 먹듯이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 너희가 귀하게 여기는 그 소금을 혼자서 독점하려고 들다가 그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항상 소금을 너희들 한 가운데에만 두도록 해야한다. 기회가 있어도, 능력이 되어도 그 귀한 소금만큼은 한 가운데 두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도 짠 맛을 잃지 않고, 그 귀한 소금도 지켜낼 수 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경쟁이 아니라 화목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서로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될 때, 그 안에 있는 성도들도 행복하고 은혜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우리 바깥의 세상을 향해서도 똑같은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교회는 다시 사람들의 귀하게 여김을 받는 짠 맛을 회복한 성도들의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소금, 화평의 소금을 우리 가운데 두어서 그 귀한 소금의 유익을 모두가 누리며 온 세상을 향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