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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9.27.금요기도회 - 그 이름을 위하여(사도행전 31)



행0538to42 - 그 이름을 위하여(사도행전31).pdf


20130927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5장 38-42절



지지난 주 금요일에 함께 살펴보았듯이 베드로와 사도들이 무사히 풀려난 데에는 당시의 영향력있는 율법사였던 가말리엘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속에서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따른 가말리엘의 행동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사도들을 살게하는 역할을 했고 교회에 커다란 유익을 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선택하고 또 행동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만큼 말입니다. ‘나비효과’라는 과학이론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태평양 저 쪽에서 나비가 한 번 날개 짓을 한 것이 태평양 이 쪽에서는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황당해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시작과 끝을 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작은 일은 항상 작은 일로만 생각되고 나 한 사람, 그리고 내가 한 선택 하나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공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며 해결책을 찾을 때, 그저 분노에만 사로잡혀 사도들을 없앨 생각만 하고 있을 그 때, 가말리엘은 전혀 요동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회가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리가 아닌 것은 결국 스스로 사그라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이 그 믿음대로 움직였을 때, 그는 사도들을 살리고 공회가 더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비록 가말리엘이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저는 가말리엘의 확신이야 말로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성도들에게 진리는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으며 결국에는 든든히 서게 되어 있으며, 이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다스리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성도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선 적어도 그런 성도들만큼은 진리가 아닌 쪽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아닌 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손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불의와 타협하고 불법을 저지르며 사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진실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진리가 아닌 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고, 진리의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거짓과 불법이 아니라 진리 쪽에 서려고 할 것이며, 그래서 결국 든든히 세워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성도들은 굉장히 담대하고 넉넉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진리는 결국 언젠가는 든든히 서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자신이 진리 쪽에 서 있다는 것만 확실하면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건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질 때도 성도들은 쉽게 부화뇌동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바로 잡을 것이며, 그래서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다면 적어도 내가 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다스리심을 믿으며 진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이 아는 자유와 넉넉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함과 확실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 자리를 지키며 가장 적절한 반응을 보입니다. 가말리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우리가 충분히 이런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사도들 또한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 또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리를 세우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진리 위에 서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자신들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흠씬 두들겨 맞고 협박을 당한 후 풀려나는 사도들이 그 일에 대해서 도무지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41절은 그들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여기서 능욕이란 수치와 불명애를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능욕받는 일이 좋은 일입니까? 수치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 일에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할 합당한 자격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기뻐할만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두들겨 맞고 무시당하며 내쫓기는 일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도 그래서 기뻐할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랬습니다. 그렇게 무시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을 자랑스러워 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 흠씬 두들겨 맞은 후에 뒤돌아서서 나오면서 씨익 웃는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우리가 그 때 거기서 그 광경을 보았다면 저렇게 두들겨 맞더니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은 이것이 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부끄러워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낙심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말입니다. 사람이 참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이렇게 변화되게 되는 이유는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과 자기 인생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사도들은 그렇게 두들겨 맞고 쫓겨날 때,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했는데, 이게 나에게 돌아온 것인가? 내가 섬겼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셨는가? 정말 창피하다. 정말 부끄럽다. 내가 창피하고 하나님이 부끄럽다. 하나님께 정말 실망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분노를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립니다. 정반대의 생각과 정반대의 감정을 품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자꾸 모든 일을 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 중심이 됩니다. 특히 좋지 않은 일을 만나면 더 자기 중심이 됩니다. 병이 들어도 부끄러워 하고, 힘든 일이 생겨도 부끄러워 합니다. 경제적으로 남만 못해도 부끄러워 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그렇게 놓아두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실제로 저는 예전에 어느 집사님과 성경공부를 하다가 그 집사님께서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장로님이셨던 그 분의 아버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장로님인 그 집사님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도 경제적으로 복을 크게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잘 살더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부끄러움도 내비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아버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전해 들은 그 분의 삶은 제를 부끄럽게 할 정도였습니다. 참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셨고, 또 가난한 이웃도 힘이 닿는 대로 도우셨다고 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믿음으로 선하게 사셨던 것이죠. 그래서 제가 아버님은 정말 성도답게, 그리고 장로답게 사셨는데, 그러느라고 자기 것 챙기지 않으신 것인데 그게 뭐가 불만이고 뭐가 부끄럽냐고 말씀드렸지만, 집사님은 그 생각을 크게 바꾸시는 것 같지는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난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건강치 못한 것이 창피한 것입니까? 힘든 일을 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것 자체로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런 것들은 남 앞에서 기죽고 힘 빠질 이유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게을러서 가난하다면, 쾌락을 일삼다가 건강을 잃었다면, 죄를 짓고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 때는 문제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그런 어려움들은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고, 소명 때문이며, 또 나의 믿음 때문이라면 그 때는 절대로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제가 대형교회 목회자들 앞에서 그 분들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고 작은 교회 목사라고 기가 죽는다면 그런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말 목사다운 목사라고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아니죠? 아마 속물이라고, 소인배라고 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까? 왜 내 잘못과 상관이 없이 찾아오는 어려움인데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인데도 그것 때문에 기가 죽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합니까?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 옛날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그 진리가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온 핍박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거나 기가 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그 핍박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부끄러움과 어려움을 당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 인정해 주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핍박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는 영광스러운 훈장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매맞고 협박을 받으면서도, 죄 없이 고통을 당했으면서도 얼굴에는 당당하고 자유로운 미소가 번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질병도, 고통도 그리고 가난도 그것 자체로는 결코 성도를 부끄럽게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부끄러워 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꼭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도 큰 법을 어긴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영광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것에 때문에도 기가 죽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겪게되는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공인 인증서이며, 또 자랑스러운 훈장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가말리엘은 진리는 반드시 서게 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 위에 서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가졌던 여유와 확실함은 바로 거기서 나왔습니다. 사도들은 매를 맞고 협박을 당하고 공회에서 쫓겨나면서도 기뻐하면서 환하게 웃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 열심히 어디있든지 간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진리 위에 서 있고,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의 이유도, 그리고 당당함과 자랑의 이유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제는 그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이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와 믿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가말리엘과 제자들의 모습을 거울 삼아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았으면 합니다. 진리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당황할 때, 나는 여유롭고 확실한 삶을 살고 있으며,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부끄러워 하고 기가 죽게 하는 이유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부족함과 어려움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라면 그것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는 그런 담대함이 있음을, 진리 안에서 살면 그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평가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위에  여러분의 인생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다스림과 승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여러분의 삶을 평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그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근거 없는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것이 너무많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하는 것이 널려있는 이 시대에 그 누구 보다도 당당하고 기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작은 사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