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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9.29.주일오전 -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마가복음 45)



막1001to12 -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마가4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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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01-12절



‘선배’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항상 후배들에게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선배란 똑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어서 그 길에서 만나는 장애물들을 이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후배들이 그 장애물 때문에 당황하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설 때, 그리고 그 후에도 종종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성도들과 가까워지지 말아라. 그러면 설교를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목사가 성도들과 친밀해 지면 성도 개개인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성도들의 아픔이나 약점, 그리고 때로는 죄까지도 말입니다. 목사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의 모든 문제와 죄들을 다루고 있고, 그래서 목회자는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적인 진리와 대답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성도들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서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으면, 특정한 성도 개인이 걸려서 꼭 전해야 할 진리를 전하는 일이 많이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배 목사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복 받으라는 설교, 잘 될 거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설교가 아니라면 어떤 설교를 하건 그 설교의 주제가 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설교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 문제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설교자에게도 불편하고 또 청중들에게도 불편합니다.그렇지만 그 불편함을 피하기만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한 쪽은 전하는 사람으로 또 한 쪽은 듣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정직해 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진리로 바로 잡혀지고 또 세워지고 회복되어져야 할 우리 삶의 구석 구석들은 무너지고 위태로운 채로 그냥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현대 교회는 이렇게 서로 서로 불편하다고 옆으로 치워놓은 성경의 진리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항상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허겁지겁 사후 약방문식의 대처를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우리 삶의 예방책이 되어야 하는데, 전하지 않고 듣지 않아서 성경의 진리가 그 귀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문제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굉장히 예민하고 또 껄끄러운 문제입니다. ‘뜨거운 감자’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 본문의 주제가 바로 교회 안에서는 ‘뜨거운 감자’같은 그런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교회 안의 성도들과는 그렇게 많은 관련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 안에도 이런 아픔과 상처를 안고 있는 분들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가족 중에라도 이런 아픔과 어려움을 가진 분들이 있게 마련이어서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굉장히 힘들어 졌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이혼’이라는 주제입니다. 껄끄럽고 예민한 문제니까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나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는 사이 교회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이 아닌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들어와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정반대로 무조건 이혼을 죄악시하고 정죄하기만하는 시각이 팽배해져 있는데 이런 두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들이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드릴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고 정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게 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것을 전제로 하고서 오늘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그런 판단과 정죄의 근거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본문을 살필 때, 그런 시각에서 접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오늘 본문을 그렇게 보지 마시고, 또 오늘 설교를 그렇게 듣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말씀에 근거해서 바꾸어야 할 기준과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유는 항상 똑같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은 다른 때같으면 그저 평범한 의견을 묻는 질문이었지만, 예수님 당시 이 문제는 하나의 사건 때문에 굉장히 민감한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유대 땅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곳은 바로 세례 요한이 사역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세례 요한이 목이 잘려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 바로 헤롯과 헤로디아가 부절적한 이혼과 결혼을 한 것을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아주 예민한 문제일 수 밖에 없었고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이 사역했던 그 자리에서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다시 예수님을 빠뜨릴 함정을 팠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래도 좋다”고 대답하시고 난 후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헤롯의 일과 연관시킨다면 그것은 헤롯의 행동을 합리화해 주는 동시에 세례 요한과는 반대의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결국 세례 요한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과 똑같은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속셈으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이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내를 버리다니! 아내가 큰 솣에 곰국만 끓여도 남편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들려지는 표현입니다만, 그것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혼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혼이란 남편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던 동시에 아내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남편은 이혼 증서만 써 주면 언제든지 아내를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혼증서라는 것이 반드시 법정에서 쓸 필요도 없는, 그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쓰고 날짜만 쓰고 서명만 하면 효력이 발생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아내들의 경우에는 법적으로는 이혼을 요구할 수는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남편의 동의가 아니라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아내들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율법이 규정하는 남편이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 또한 정말 말도 안되는 것들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행실이 나쁘면’ 남편은 언제든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나쁜 행실’ 속에는 심지어는 빵을 태우는 것이나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그 어떤 이유로든 이혼증서만 써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자들은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약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를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을 구실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받아서 전혀 다른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대답합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서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신명기 24장 1-2절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이 구절에 의하면 아내를 내보낼 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면 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혼이 가능한 유일한 조건은 아얘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부정을 저지른 경우에 한해서만, 그것도 남편이 정 그것을 용서하고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이 아니라 ‘허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 속에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보내면 된다는 부분만 떼어서 이혼문제에 대한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완전히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된 기준을 모세의 율법으로 생각하며 그것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답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결혼에 대한 창세기의 가르침을 물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또한 모세가 기록했으니까요. 먼저 이야기된 원칙과 원리가 있고, 거기서 파생된 법이 있다면 둘 중에서는 언제나 먼저 이야기된 원칙과 원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 보다는 창세기의 말씀이 우선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더 먼저 주어진 창세기는 생각지도 못한 채로 그저 모세의 율법, 그것도 자기 멋대로 해석한 율법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것만 글자 그대로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마음대로 뒤바꿔 놓은 이혼법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원래의 이혼법 마저도 그것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법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기준을 지킬 수 없을만큼 완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신 궁여지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주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당시에 가정에서는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절대로 이것이 용서도 되지 않고 이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절대로 이혼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대할까요? 분명히 학대할 것입니다. 정죄하고 멸시할 것입니다. 함께 산다고 해도 전혀 인간취급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다가 분을 참지 못하면 결국 아내를 죽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막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부부지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항상 그리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면 ‘완악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정 용서가 안되고 용납이 안된다면 그 때는 합법적으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보내라는 허용규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이혼증서를 가지고서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살아가도 된다고 허용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나오는 이혼법은 이혼에 대한 남편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생겨난 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비록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인의 부정을 그래도 괜챦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히 그것은 저질러서는 안되는 죄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나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 한 번으로 다시는 용서받지 못하고 다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고서 평생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야 마땅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죽게 만드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독생자의 피 값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복된 삶을 살아갈 기회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신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원래의 법, 그러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진짜 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원래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뜻과 기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새로운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그 누구도 절대로 나눌 수 없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원칙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 자신이 아닙니다. 결코 남자와 여자는 스스로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결혼을 통해 이런 불가능한 연합을 이루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그렇게 한 몸이 된 자신들을 마음대로 나눌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린다면 쓰던 물건 실증나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내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결혼에 담아놓으신 원리이며,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순종해야할 할 결혼에 대한 대 원칙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리 결혼하고 이혼하는 일을 가볍고 쉽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원칙을 아는 우리 성도들로서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현실론에 밀려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에 오랫동안 혼자 사시다가 한 번 결혼에 실패하신 남자 집사님을 만나 느지막하게 결혼을 하신 한 여집사님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재혼을 하셨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행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는 새로 남편이 되신 남 집사님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렇게 골이 깊어져 가다가 전혀 결혼생활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자주 다투시던 여집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평소에도 조금 친하게 지냈던 터라 편하게 이런 저런 상황과 사정을 이야기 하신 후에 아무래도 자신은 새 남편과 헤어져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저 이혼해도 되겠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난감한 질문이 아닙니까? 물론 저는 그 집사님이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가 아니라 지지를 받기 위해서 저를 찾아오신 것이었으니까요. 그 때 저는 원론적인 대답 밖에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의 아픔과 고민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죄된 선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선택은 집사님이 하세요. 그렇지만 그 선택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 또한 집사님의 몫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마 실망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저마저 편을 들어드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목사로서 그렇게 밖에 달리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 두 분은 헤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여집사님께서는 그래도 다시 한 번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도 두 분이 함께 교회에 오시기도 했으니까요. 


제가 이혼의 아픔과 어려움을 몰라서 그렇게 원칙적인 말씀만 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저희들 때문에 나중에 다시 합치시기는 했지만, 저희 부모님도 제가 어렸을 때 수년 간 이혼상태로 살아가셨고, 그래서 저는 부부가 헤어진 가정의 그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생생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정의 자녀들의 찟어지는 듯한 마음의 고통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성장해 가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제가 그 아픈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남의 가정사에 대해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를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율법적인 기준만을 가지고 헤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또 그렇게 헤어진 가정을 삐딱한 정죄의 눈으로 보아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헤어지는 부부는 거의 대부분 그런 결정을 쉽게 내리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것이 지옥이고 함께 사는게 죽는 것만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혼을 그저 충분히 할 수 있는 하기 힘든 선택정도로 보거나 하나님 앞에서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짝지워 주실 때,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사람이 깨뜨려서는 안되는 것을 깨뜨렸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영원한 저주와 정죄를 받을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선택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청년들이나 혹은 결혼한 자녀를 두신 성도님들께 권면합니다. 그러실리는 없다고 믿습니다만, 절대로 결혼과 이혼에 대한 순전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견해를 가지고 여러분 자신이나 혹은 자녀들의 결혼과 이혼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결혼과 이혼은 결코 그저 인간사 중에서 조금 중요한 일에 속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결혼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십니다. 두 사람을 부부로 묶어주시고 한 몸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장 우선되는 원칙은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내 맘대로고, 헤어지는 것도 내 맘대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빨리 고치시기 바랍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허용’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완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혼보다 더 악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허용’하신 것입니다. 마치 뚝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뚝 한 곳을 터놓 듯이 말입니다.  


또 모든 성도님들께 권면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을 완전히 만족시킬만한 수준의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완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더 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신 차선책들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 속에 완악함을 가지고 있는, 만약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아주시지 않으면 그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불행이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용납해야 하며 또 사랑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특히 이혼과 관련해서, 아직도 혹시 이혼한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는 마음이 남이 있으시다면 이제는 여러분의 눈을 긍휼히 여기는 눈,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눈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정죄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은 분별해야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잘못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칙을 분명히 이야기하시면서도 그 속에서 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완악함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잘못은 잘못이라고 판단하시면서도 또 여전히 우리를 긍휼이 여겨 주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배우고 흉내내야 할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과 눈입니다. 우리가 우리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과 눈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들 또한 다른 사람의 불행과 아픔 앞에서도 그저 잘잘못만 따지며 정죄할 이유만 찾는 바리새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와 여러분 처럼 보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될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항상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리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통해 옳고 그름을 분명히 분별하면서도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향한 긍휼함과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 주님을 닮은 이런 온전한 성품이 자리 잡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완악하고 부족한 나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그 은혜를 계속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정죄와 판단이 앞설 때, 그럴 때마다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완악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누그러들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닮은 마음도 조금씩 조금씩 지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셔서 그 어떤 순간에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우리 주님 닮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