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3.09.29.주일오후 -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전교인 기도회 5)



계0212to17 -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1).pdf


20130929SE (#0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2-17절



우리는 비록 한 달에 한 차례이지만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신 주님의 편지를 하나씩 하나씩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교회들을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을 위한 모범으로 삼을 수도 있고 또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교회, 그러니까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보내신 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버가모 교회 또한 에베소 교회처럼 주님의 칭찬과 책망을 모두 받았던 교회입니다. 아마도 현실 속의 많은 교회가 이럴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주님이 칭찬하실만큼 잘 하는 것도 있겠지만, 반대로 주님의 책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잘 못하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의 사명이 있다면, 이런 말씀들을 거울 삼아서 잘 하는 것은 더 살리고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없애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것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고 또 늘려가야 하지만 반대로 주님의 책망을 받을만한 것이 있다면 그런 것들은 줄여가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교회적으로 그렇고, 또 그 다음에는 개인적으로 그럴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주님께서 칭찬해 주실 것들이 많아지는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이것이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하신 첫 말씀이었습니다. 굉장히 섬뜩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버가모라는 도시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도시가 사탄의 위, 그러니까 사탄의 왕좌가 있는 도시라고 말합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이 성도들은 그렇게 영적으로 본다면 최악의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대구에 와서 정말 몇 가지 때문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첫번째로 놀란 것은 대구에는 절들이 서울로 표현하면 마치 교회처럼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택가에도 있고, 신천변에도 있고, 또 대로변에도 있습니다. 두번째로 놀란 것은 운불련이 있다는 것인데, 이게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도시에서건 운불련이라는 단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세번째로 놀란 것은 성도들 중에서 신앙 때문에 가정에서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리한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 믿기만 한다면 주님의 칭찬을 받는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는 에베소와 자웅을 겨루는 도시였습니다. 거의 모든 면에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우상숭배나, 혹은 학문발달이나 생활수준이나 거의가 비슷 비슷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앞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였지만, 버가모에는 도시의 언덕 가장 꼭대기에 그 도시 전체를 내려다 보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전은 오히려 왕궁보다도 더 컸습니다. 마치 팔공산 꼭데기에 갓바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버가모는 황제 숭배의 총본부였던 것입니다. 


황제숭배의 본거지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딱 한 가지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의 구호는 “시저가 주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황제의 신전에 가면, 그리고 황제가 행차할 때면 언제나 그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구호는 바로 “예수가 주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말 자체가 황제숭배에 대한 정면도전이었고 또 황제에 대한 반역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숭배의 본부와도 같은 곳에서 이런 사람들을 그냥 놓아둘리가 없습니다. 13절 후반에 보시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탁월한 전도자였던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를 당하는 일도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박해가 어디 안디바 한 사람의 일로 끝났겠습니까? 분명히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 전체가 바로 거의 비슷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따돌림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모의 성도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버가모의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그것을 확실히 하고, 모든 어려움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좋은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할까요? 그런 믿음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인정하고 그 주님을 무슨 일이 있어도 바꾸지 않는 것”, 그리고 “삶을 통해 이것을 증명하며 사는 것”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원래 성경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할 때, 그 보다 앞서 말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회개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전제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흔히들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하지만,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개란 하나 하나의 죄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삶 전체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던 삶을 떠나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는 결국 이렇게 해서 한 번 바뀐 주인을 절대로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그리고 그 교회의 성도들은 바로 이 일을 해 냈고 주님은 바로 이것을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남들보다 예수믿는 믿음을 지키기 힘든 환경 속에 계십니까? 그 안에서 믿음을 지켜가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리한 여러분의 환경은 오히려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환경과 조건의 어려운만큼 주님의 칭찬과 기쁨도 커질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를 더 좋아하고 부러워 합니다. 누릴 것이 많고 배울 것이 많고, 훨씬 더 편안하니까요. 그렇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것은 커다란 오판입니다. 작고 부족하고 불편한 것이 많은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잘 하면, 그렇게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믿음을 성장시켜 가면 그것이 주님의 더 큰 칭찬을 받는 일에는 훨씬 더 유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땅만 볼 때하고 하늘을 함께 바라볼 때의 차이입니다. 하늘을 함께 바라보게 되면 인생이나 환경,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를 바라보는 것까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 틀에서 보면 이렇게 큰 칭찬을 받았던 버가모 교회도, 교회 전체의 문제는 아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문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14절에서 “네게 발람을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민수기 22장인데요.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나서 적은 수를 가지고도 승승장구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모압 왕 발락은 자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계책을 마련합니다. 바로 선지자인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락은 하나님도 자신이 섬기는 잡신처럼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발락에게 그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발락의 제안을 받고 고민합니다. 여러분, 발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선지자로 세워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발람이 가야 옳습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고민하다가 갔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바로 돈 때문입니다. 그는 돈에 팔려서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돈에 눈이 멀었느냐 하면 칼을 들고 자신을 막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심각합니까? 나귀도 본 그 천사를 선지자인 발람이 보지 못했다니 말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나귀가 말을 하는 말도 안되는 역사를 보여주시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갔습니다. 정말 나귀만도 못한 선지자가 된 것이죠. 무엇때문에요? 바로 돈 때문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돈은 이용해야할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돈에 정신이 팔리면 그 돈은 그 사람에게 완전히 마약하고 똑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양심을 마비시켜 타고 다니는 나귀가 말을 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영적인 감각을 무뎌지게 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심히 일하셔서 돈을 많이 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절대로 돈을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돈에 집착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거든 돈은 기꺼이 포기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됩니다. 돈이 하나님이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통해서 돈을 섬기는 발락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나 교회는 언젠가 한 번은 믿음으로 돈 문제를 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돈이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에서 적어도 크게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경험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돈의 문제를 극복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성도는 돈이 없어도 평안하게 넉넉하게 살아지고, 교회가 돈이 부족해도 믿음 안에서 부요하게 살았던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경제적인 문제만 걸리면 쩔쩔 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따지고 보면 결국 돈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바로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자유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문제만 나오면 약해지고 무너지는 발락을 닮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환경은 항상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탓하고 조건을 핑계대기 시작하면 우리는 의미있고 무게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어 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우리의 모든 상황이 내가 예수를 믿는데 아무런 지장 없는 상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그런 환경이 주어진다면 정말 내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런 저런 불편이 있고 장애가 있다고 여겨지는 바로 지금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기 힘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어떤 의미에서건 내 속에 있는 돈에 약한 발락을 닮은 모습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돈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성도됨을 잃어버리고 교회됨을 잃어버려 주님의 책망을 받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꼭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버가모 같은 이 세상에서 발락의 유혹을 이겨내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