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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0.04.금요기도회 -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사도행전32)


행0601to07 -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사도행전3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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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좋은 일 다음에 계속해서 좋은 일만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세상 일이란 우리 기대와 소망대로 그렇게만 흘러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서 서로 어울려 가며 자아내는 옷감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도 그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장부터만 살펴보아도 그런 패턴이 계속됩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일어납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악하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그 일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교회는 더 부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권능을 더하셔서 사도들은 많은 병자들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 때문에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시기를 샀고 그래서 사도들이 붙잡혀 갔습니다.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적이 섭리로 사도들이 풀려납니다. 정말 말 그대로 기적처럼 좋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로 더 큰 확신을 얻은 사도들은 전도와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더 열심을 냈고, 그 결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 때문에 또 한 가지 좋지 못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예수를 믿자 마자 정말 아름답게 세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넉넉히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서 끼니걱정을 해야할 형제와 자매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색을 내는 사람도 없었고, 그 일 때문에 수치스러워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많아져서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음식물이나 필요한 것을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누워 주는 일을 사도들이 충분히 겸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성도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니 그 많은 숫자 중에 포함되어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사도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해서 본의 아니게 누락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사람들 중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인 미망인들이 많이 포함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을 당하는 쪽에서는 충분히 의도적인 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 일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사도들은 이 일에 대해서 너희가 예수를 믿고 나서도 그것 밖에 안되느냐고, 그런 일로 이런 소동을 벌이느냐고 책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들이 그런 실수를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그래서 이런 문제가 생겨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사도들이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의 성도들의 영적인 수준이 아직은 성숙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할 사람들이지만 사도들은 그들이 이제 갓 예수를 믿은 영적인 어린아이임을 알았고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너무 성숙한 수준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사도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의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또한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의외로 굉장히 어린 신앙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한 시간으로만 보면 충분히 성숙해야 할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인 상태로 남아있는 성도들도 얼마든지 있고, 너무 미숙한 모습만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성숙도를 요구하기가 쉽지만,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해온 세월이나 직분과는 별도로 여전히 미성숙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부도덕한 것만 아니라면 이해하고 기다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미숙한 모습이 저마다 한 두가지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에게 있는 이런 미숙함 때문에 서로를 정죄하고 또 화를 낸다면 교회는 항상 갈등과 분쟁이 떠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들 또한 전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부족함이 있고 미숙함이 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지 암초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미숙한 모습을 성숙하게 바꾸어 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미숙함은 최선을 다해서 용납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며, 또 서로의 성숙함을 위해서 기도하며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이 찾아낸 결론과 해결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재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 


헬라파 유대인 미망인들이 구제에서 빠지고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겨난 일 자체는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일을 통해서 사도들은 그 때까지 놓치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보다 가난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주는 일에 더 열심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렇게 미성숙한 채로 남아있었던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 바른 말씀이 가르쳐 지지 않으면 성도들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자체에 대해서도 굉장히 커다란 오해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영적인 미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사도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성숙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그런 사역방식에 대해 올바른 사역방식이 아니라고 냉정한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역만 중요하고 다른 일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사역의 우선순위와 경중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리도 어수선하고 질서가 없는 것은 바로 목사도 성도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순서를 잘 지키지 않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사역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일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심한 경우는 교회가 숫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소위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숫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이라면 무조건 따라갑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이 빠져있습니까? 교회의 기둥이고 기초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빠져 있습니다.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숙시켜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아도 그 때뿐이고 성도는 늘어나지만 미성숙한 성도들만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고 가르쳐 지지 않으면 그 교회에는 분명히 이런 저런 문제들이 훨씬 더 많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방향제시도 없고 또 성도들은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말씀이 소홀히 여겨지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문제의 진짜 원인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원인을 바로잡는 것을 그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찾았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오로지 기도와 말씀사역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일에 우선적으로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으니 교회도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교회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어버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어 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사역의 원리와 교회가 세워져 가는 원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사도들은 문제가 생기자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하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실 때,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 성령충만하여 져서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 두 가지 역할만 맡기셨을까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해야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가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했을 때 교회가 세워지고 또 성장해 가기 위해 필요한 나머지 일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딱 나누기는 힘들지만 말씀사역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기도는 성령충만함을 얻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다시 기도와 말씀, 두 가지에만 전념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교회와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가 오늘날이라고 바뀌었을까요?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충만함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부수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충만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의 기둥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변할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되는 기초입니다. 언젠가 사도행전과 오늘 본문을 읽다가 저는 바로 그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발견했다거나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지 않는 것은, 그 때 제 마음에는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바로 세워져야만 하며 또 그 두 가지만을 통해서도 충분히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저의 사역을 위한 훤히 뚫린 길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지름길은 아니지만 확실한 길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내가 너를 어디로 보내든지 거기서 이 두 가지, 말씀과 기도에 우선적으로 힘쓰거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저를 향한 하나님의 두번째 부르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보내심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요구이고 또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지만 제가 돌보아야 할 성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은 그 걱정 때문에 처음 우리 교회에 왔을 때는 굉장히 힘들어 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 목회의 원래 방향에 자신의 신앙을 맞추어 가기 위해서 예전보다 훨씬 더 애쓰고 계시고, 그런 부분에서 의미있는 진보가 있었던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진지함이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중에서 분명히 작은 변화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저를 우리 교회로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이 두 가지 일을 그만 두거나 약화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저를 향한 부르심이고 또 저는 오늘날에도 분명하게 이 두 가지가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왕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교회에 말씀과 기도가 약해진다면, 그 교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그런 교회는 결코 건강하고 힘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는 그런 교회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기둥이 없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서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 기둥을 붙들기 위해서 애쓸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5절을 보시면 사도들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겠다’고 했을 때, 성도들이 모두 다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두 가지 기둥을 붙드는데 있어서 사도들과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저보다는 오히려 여러분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한 존재이며,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기도하는 일에 함께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계속 성장해 가시고, 또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더욱 더 뜨거워져 가시시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사실 저는 지금 여러분과 함께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실험은 온갖 목회적인 프로그램과 교회성장을 위한 방법이 난무하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교회가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실험입니다. 저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제가 그 길로 가고,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 함께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초대교회처럼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정말 든든하고 성령과 기쁨이 충만한 교회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일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직접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의 목사로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겸손하게 기도하는 목회자로 살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더 기뻐하고, 더 순종하며 그래서 말씀의 능력 가운데 서게 해 달라고, 우리 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되게 하셔서 잘 되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우리의 삶과 신앙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교회를 말씀과 기도의 터 위에 세워진 든든하고 건강한 교회, 성숙하고 기쁨 넘치는 성도들의 교회로 세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