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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09.새벽예배 -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세기 61)


창1816to33 -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61).pdf


20131009D (#01).mp3.zip




  문 : 창세기 18장 16-33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은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으셨고 굉장히 흡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천사들과 하나님을 전송하러 나온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와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마스터플랜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마당에 아브라함에게 하려는 일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죄악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져버린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를 직접 알아보고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천사 둘만을 보내시고 자신은 아브라함과 함께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마치 무언가 아브라함과의 사이에서 끝내지 않으신 일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로 영성도 최고의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너무 좋습니다. 앞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말씀도 듣습니다. 하나님의 전폭적인 신뢰를 표시하는 말씀도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괜히 다른 사람들, 특히 엄청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불행에 끼어들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참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놈의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그 성읍들의 죄악상을 직접 알아보러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왕에게 간언할 것이 있는 신하처럼 하나님께로 바짝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두 성을 위해서 중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심판자는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만약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인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만약에 그 성읍에 의인 오십 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그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은 이 의인의 숫자가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대답을 거듭 거듭 들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여섯 번씩이나 그렇게 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충분히 자신에게 화를 내실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제시하는 의인의 숫자가 30명으로 줄어들었을 때는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라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들이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죄로 물들어 갈 때,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말 그대로 빨리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을 벌주시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이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죄악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 둘만 보내시고 하나님 자신은 아브라함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여섯 번의 간청에 대해서 대답해 주신 후에 가셨습니다. 33절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재자가 되어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이나 그렇게 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제서야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행동을 했습니다. 기꺼이 그 죄악으로 멸망해 마땅한 성읍들을 위해서 여섯 번이나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행동을 원하셨고, 또 아브라함은 또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우리는 처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람이었던 시절, 그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그를 부르셨던 부름, 그러니까 소명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적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하셨죠?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소명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이 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소명을 자신의 소명으로 제대로 받아들인 모습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슬쩍 흘리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서 모른 척 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그들이 정말 멸망당해 마땅한 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벌이나 받아라! 다 망해버려라!”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도 생각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도록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우리들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참 이스라엘 자손들인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저주스러운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의지적으로라도 그런 마음과 생각이 들면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스럽고 죄악이 만연해 가는 이런 시대, 이런 사회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닮은 세상을 위한 복의 역할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인지도 모릅니다. 항상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사실 세상을 죄로 물들이는 사람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복의 역할을 감당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또한 예수님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의 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런 우리들을 저주하고 처벌하시는 대신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런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살게 하시고자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용서하기 힘들 때마다, 저주스런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흉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한 복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항상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시든지 우리가 그들을 위한 복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복으로 채워가는 세상을 위한 복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