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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0.13.주일오전 -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가복음 47)


막1017to22 -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가47).pdf


20131013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17-22절


사람마다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집단도 마찬가지이고 한 나라나 세계 전체로 보아도 그렇고, 시대나 시기 별로 보아도 항상 그런 것이 있게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서 ‘이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 중요한 것에 대해서 물을 때, “요즘 이슈가 뭐냐?”라고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여러분의 ‘이슈’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무언가는 여러분의 관심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한 가지라도 있을 줄로 압니다. 청소년들이라면 외모나 학업 혹은 이성이나 아니면 아이돌 스타들이 이슈일 것이고, 청년들이라면 아마도 취직과 결혼이 이슈가 될 것입니다. 결혼을 하셔셔 자녀를 키우시는 분들은 자녀교육이 이슈일 것이고, 이미 중년이상의 나이에 접어드신 분들은 노후대책이나 건강이나 또 출가한 자녀의 문제가 이슈가 되어 있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이 이슈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시대, 그 사회를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도 이슈가 되는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이슈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오히려 그런 것들에 골몰하지 않는다는 것때문에 불안해 하는 조금은 이상한 일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언가를 이슈로 삼을 때, 정작 꼭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 질문이란 바로 “과연 이런 것들이 내가 이런 것들을 이슈로 삼고서 살아가야 할만큼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이슈로 삼고 있는 그 문제들은 정말로 여러분이 거기 붙들려 있고 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야만 할만큼 진짜로 그렇게 중요한 일들인가요? 꼭 한 번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진짜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느라고 정작 이슈로 삼아야 할 것들은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후, 길에 나서시자 마자 한 사람이 허겁지겁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미 우리가 읽어서 알다시피 이 사람은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거의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예수님 앞에 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에는 항상 의미가 담겨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예수님께로 급하게 달려왔고 앞에 오자마자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는 것은 무언가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무릎을 꿇은 그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이슈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흙먼지 나는 길 위에 꿇어앉게 만들만큼 이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도 선하신 선생님, 그러니까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선생님으로서 선악의 기준을 분명하게 알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보았나요, 잘못 보았나요? 제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듣자 마자 정색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 사람은 좋은 질문을 가지고 왔고, 그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을 하는 그의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었고, 게다가 예수님을 향해서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정색을 하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저희 집 큰 아이가 중학교 1학년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갑자기 고등수학인 선형대수에 대해서 궁금해서 자기 반에 있는 수학을 조금 잘 하는 아이에게 물어본다면 그것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배울 수 없겠습니까? 배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보다 조금 더 선한 선생님이시니 자신에게 영생을 위한 길을 알려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영생의 길은 자기보다 조금 더 선한 한 인간에게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선하셔셔 무엇이 진짜로 선한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하나님만이 가르쳐 주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하신 이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는 조금 덜 선하니까 자기보다 조금 더 선한 사람의 도움을 얻으면 영생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영생에 대한 그런 생각 자체가 넌센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이것은 완전한 대답이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뒤에 들려주실 진짜 대답으로 가기 위해서 사용하신 징검다리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그 동안 이 사람이 영생에 대해서 가져왔던 생각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름대로 거기 필요하다고 믿었던 율법들을 열심히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조금 더 선하다고 여겨지는 선생님을 찾아와서 그 부족한 것을 배워서 보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있게 다시 이야기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여섯 가지의 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분명하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저만해도 이 중에서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킨 것이 없고, 정말 수없이 어기고 또 어겨왔는데 말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런 계명들을 잘 지켜왔습니다. 적어도 기억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 왔다고 자부할 정도로 잘 지켜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왜 그렇게 철저히 그런 것들을 지켜왔을까요? 그것은 그가 어려서 부터 배워 알고 있기로는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첫번째 대답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전부가 아니라 절반만 을 거론하셨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반의 공통점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계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 사람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거기가 세상의 끝이며 그 너머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너머로 가려고 엄두를 내지 못했죠. 끝은 그야말로 끝이고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다라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가 정한 좁은 울타리 안에서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신앙을 어떤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로 이해하면 신앙은 여러가지 규칙에 메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신앙을 가지는 일, 심지어는 구원을 얻는 일까지도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에 메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어떤 율법적인 조항들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들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여섯 가지 율법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성도 여러분, 이 여섯 가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정말 대단한 것들입니까? 이런 것들만 지키면 정말 완전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이 계명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신 것들일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런 것들은 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똑같이 가치있는 존재로 여긴다면 자동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원래 율법, 특히 십계명은 선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악하게 살아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신 법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지킨다고 사람은 결코 선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저 더 악해지는 것을 겨우 겨우 막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것들을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을 행하는 일은 영생을 얻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는 그 사람을 보시고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영생에 대한 관심과 간절함은 정말 좋은 것이었지만 그가 그 길을 알기 위해서 묻는 질문은 번지수가 너무나 잘못된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예수님의 진짜 대답은 그를 꾸중하거나 그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답이라고 말합니다. 왜 마가는 굳이 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를 향해서 엄청나게 불편한 요구만 하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들려주셨던 두번째이자 마지막 대답은 굉장히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대답입니다. 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물질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들릴 수 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 말씀을 들려주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대답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네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진짜 대답, 그러니까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실 수 밖에 없으셨던 대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그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민하게 하며 또 낙심하게 할 줄 아시면서도, 그저 기분좋은 거짓 대답이 아니라 진짜 대답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거짓 대답으로는 결코 그가 원하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 속에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며 고민하게 하는 말씀들이 쓰여져 있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영생의 길이며,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것말고 다른 것, 참되지 않은 거짓된 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더라도 말입니다. 


“가서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 구절은 제가 보기에 어쩌면 대표적으로 오해되는 구절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 구절은 돈에 대한 말씀이고, 또 가난한 이웃을 그 돈으로 섬기는 일에 대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상을 받으려면 가난한 이웃을 구제해야 한다는 뜻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말씀의 액면가이지 진짜 가치가 아닙니다. 


저는 저희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과자를 주면 그것을 굉장히 아끼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 그럴 때면 저는 간혹 “아빠도 그거 하나만 줄래?”라고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가 아들의 과자를 뺏아먹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그렇다구요. 뭐, 물론 여러분의 생각대로 저같은 인간은 충분히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그거 알겨먹겠다고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극히 선하신 아빠들은 그런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질문은 사실 아이가 아빠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적어도 자신이 아끼는 것을 줄만큼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자에게 “네 돈 내놔라. 다 포기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21절을 잘 살펴보면 두 가지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 두 가지는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는 것과 하늘에서 보화를 얻는 일, 정확하게는 땅의 보화를 사용하는 일과 하늘의 보화를 얻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를 완전히 한 덩어리로 연결시켜 놓으셨습니다. 바로 이 연결 속에 우리 주님의 말씀이 가지는 진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떠올려야 할 성경말씀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율법선생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율법선생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이 우리가 떠올려야 할 첫번째 말씀이고 두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나오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인데 이 구절에서 재물로 번역된 단어는 ‘맘몬’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돈이나 재물이 아니라 이미 신처럼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린 돈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하나님과 대적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우상이라고 보셨고,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영생을 얻게 해 주는 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꼭 풀어야 할 숙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맘몬을 섬기지 않는 것과 하나님과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엄청난 난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숙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적수인 재물을 섬기지 않는 동시에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복잡하지만 답은 의외로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돈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그 돈을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움켜쥐려고만 할 때, 돈은 언제나 맘몬이 됩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돈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돈은 움켜쥐려고 하지 말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돈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돈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돕고 살아가라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물질적으로도 헌신하며 살아가라고 하신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럴 때에만 재물을 맘몬으로 만들어 섬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 사람은 영생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왔고, 예수님은 영생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너무 많아서 영생을 위해서도 포기하지 못할만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 많은 재물이 자신의 영생을 위한 가장 부족한 것 한 가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지고 있는 재물의 양은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재물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 많아도 기꺼이 그것을 더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적은 재물이어도 그것에 얽매여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 적은 재물은 그 무엇보다도 많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맘몬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을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고, 영생이라는 것이 참 신앙의 열매라면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얻기 위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가강 쉬운 돈을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는 일을 추천해 주신 것입니다. 과연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주님은 분명히 그 방법을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들을 위한 가장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주님은 땅 위의 재물과 하늘의 보화를 나란하게 놓아 그 사람 앞에 놓아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그 두 가지를 저울질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애석하게도 그 저울질에 실패했습니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에서, 그리고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에서 저울질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재물은 그에게 맘몬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생에 대한 해답을 듣고서도 다시 해답이 없는 삶으로 되돌아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섬기지 않고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려면 우리는 이 땅의 보화보다 하늘의 보화를 더 크고 값진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보화의 진짜 가치를 아는 눈이 확실히 열려야 합니다. 하늘에서 누리게될 영광스러운 영생을 이 땅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참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런 말씀들은 쉽다, 어렵다를 기준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답도 우리를 위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어렵다에 걸려서 좌절과 포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늘보화가 땅의 보화보다 소중해 지는 일, 그래서 땅의 보화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게 되는 변화는 분명히 은혜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런 변화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변화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런 변화의 은혜를 받는 일이 우리의 의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해 지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그것을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보화가 땅의 보화보다 더 소중해지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땅의 보화를 하늘보화를 위해서 투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고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소원이 있고 의지가 있다면 믿음을 가지고 차분히 한 발 한 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마음과 생각을 그 분의 마음과 생각에 일치시켜 가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의 저울은 점점 땅이 아니라 하늘 쪽으로, 그리고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기울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생의 문제는 그 날 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재물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 그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보화를 얻기 위해 땅의 보화를 투자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셔서 가장 확실한 영생의 길을 걷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많든 적든 나의 재물이 내 신앙의 걸림돌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2.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주신 복을 흘려보냄으로써 나에게 주신 복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게 해 주소서. 이제는 돈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그 돈을 사용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