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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17.새벽예배 - 롯이 그 두 딸과 함께(창세기 66)



창19309to38 - 롯이 그 두 딸과 함께(창66).pdf


10131017D (#01).mp3.zip




  문 : 창세기 19장 30-38절


성경을 읽다가 보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성경에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기록될 필요가 있었는가?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창세기만해도 그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두 딸이 아버지를 취하게 해서 가문의 대를 이었다는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자기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 상식적으로도 너무나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쓰여있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성경이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커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한 번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후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고 또 지으며 점점 더 커다란 죄를 지으며 더 악해져 가는 그런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커지고 짙어져도 그 은혜의 물줄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정직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러한 정직한 이야기를 통해서 죄인인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항상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실을 피하면 우리는 진실만이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은혜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롯은 요단들의 모든 성읍들이 멸망할 때, 소알로 가겠다고 떼를 써서 소알로 피했습니다. 거기에 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소알로 들어간 롯은 이상하게도 그 곳에 거하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합니다. 안전을 위해서 피해들어간 곳에서 롯은 전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소알 또한 요단들에 있었던 성읍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소알은 그 성읍이 다른 성읍에 비해서 죄가 적어서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롯이 거기로 피했기 때문에 심판을 면제받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롯은 누구보다도 소알 또한 그 죄악에 있어서는 멸망한 다른 성읍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소알 또한 언제든지 그 죄로 멸망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두려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임시방편이 가지는 문제입니다. 임시방편은 그야말로 임시방편이어서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자신의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괜찮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항상 영적인 불안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바로 그것이 성도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롯은 두 딸을 데리고 원래 천사들이 가라고 했던 곳으로 갔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서 동굴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화려함과 풍요로움만 보고 요단들을 택했던 롯이 마지막으로 만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두 딸과 함께 집도 아닌 동굴에 살게 되다니 참 서글프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 위의 동굴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서 살아가는 일 자체도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런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롯의 딸들이 결혼할 남자들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롯의 후손들이 이 세상에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롯의 두 딸은 서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결론은 아무래도 여기서는 정상적으로 결혼할 남자를 구할 수가 없으니 아버지인 롯에게서 대를 이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딸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자기 집에 온 나그네를 구하려고 폭도들에게 딸들을 내어줄 생각을 했던 아버지 롯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두 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에 아버지와 동침해서 자녀를 갖자는 것이었고, 두 딸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큰 딸은 모압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작은 딸은 암몬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는 두 가지의 가치가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혈통을 잇는 일과 나머지 하나는 가족 속에서 지켜져야만 하는 윤리적인 원칙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윤리적인 원칙을 깨뜨리지 않는 한, 혈통을 보존해야 한다는 나머지 가치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중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것은 가족간의 윤리적인 원칙입니다. 이것을 깨뜨리는 것은 부도덕 중의 부도덕입니다. 이것은 혈통을 잊지 못하게 되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은 이상하게도 둘 중에서 덜 중요한 것을 택했고, 더 중요한 것을 무시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당연하게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식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아버지를 속이고 그런 일들을 한 것으로 보아서 두 딸은 그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일과 혈통을 유지하는 일 사이의 가치판단에 실패했고 그래서 덜 중요한 것을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에는 항상 우선순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다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죠. 이것을 지킬 때, 삶은 질서를 잃어버리지 않고 혼란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덜 중요한 것을 지키고 얻느라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양보하는 실수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물들어 버리면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또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며 더 작은 죄를 피하려고 더 큰 죄를 범하며, 작은 유익 때문에 죄악된 선택을 하게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롯의 두 딸은 자신들이 대를 잇기 위해서 정말 커다란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가족의 혈통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생각 자체가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단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지른 커다란 악행에 불과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가치와 사고방식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 자체도 쉽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인 분위기가 다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흐름에 편승하게 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익숙해 지는 일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만큼의 분별력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별력대로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신앙적인 용기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란 바로 이런 분별력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믿음의 용기란 이런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분별력을 키워가시고 또 이런 용기를 견고히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자신도 지키시고 또 하나님의 진리도 지켜나가시는 올곧은 신앙인으로 서서 확실하고 든든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