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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0.18.새벽예배 -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창세기 67)



창2001to07 -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창67).pdf


20131018D (#01).mp3.zip




  문 : 창세기 20장 01-07절


이제 이야기는 롯에 대한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남쪽 네게브 지역으로 옮겨 그랄이라는 곳에 잠시 거류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 지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삶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었지만 사실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위험과 불안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삶이었습니다. 롯이 나그네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소돔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도 이것이 싫어서 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살지 말고 이 땅에 하늘나라를 향해 여행하는 자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을 통해서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롯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부르심대로 나그네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 땅을 영원한 거주지로 여기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 말입니다. 이 고민은 참 쉽지 않은 고민입니다. 만약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도저히 나그네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누가 불안하고 위험한 삶을 자처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르심은 또 부르심인지라 그냥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답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답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하늘의 복을 우리의 삶으로 흘러들어오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그네로 살면서도 불안해 하지 않고 위험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스스로 나그네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아브람이 그랄 땅, 그러니까 아비멜렉의 땅에 잠시 머물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나오는 이름을 제외하면 이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사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직책의 이름입니다. 이집트에서는 왕을 바로, 그러니까 파라오라고 불렀듯이 그랄에서는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머물던 헤브론에서 꽤 먼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낯선 곳으로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브라함은 또 옛날 버릇이 나옵니다. 바로 여기서 아브라함은 또 한 번 아주 악한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한 번 저질러진 죄도 나쁘지만 죄가 나쁜 진짜 이유는 우리 삶에 한 번 파고든 죄는 또다시 반복되기가 그 이전보다 훨씬 쉬워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애초부터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소개한 후 그 지역에 머뭅니다. 애굽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해서 또 다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애굽에서 있었던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데리고 간 것입니다. 참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아비멜렉이 몇 살인데 그 당시 90세였던 사라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데리고 갔을까요? 또 90살인 사라가 아름다우면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그렇게 했을까요? 이것이 이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떵한데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은 사라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정략적인 결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이미 그 당시 아브라함은 상당한 재력가가 되어 있었고, 또 아주 많지는 않아도 병사들도 상당수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비멜렉의 계산으로는 그렇게 하면 재정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굉장히 유리해질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실재로 아비멜렉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얘는 내 동생이에요.”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으니까요. 그런데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세상에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에 자기 동생이라고 해서, 그리고 남편도 없고 해서 데리고 왔는데, 그 여인이 알고보니 남편이 있는 여자이고 그래서 그 여자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 아브라함이 자기는 오빠이고 사라는 자기 누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저는 양심에 가책이 전혀 없습니다.” 아비멜렉의 항변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에 동조해서 자신을 따라온 사라에게 있지 그에게는 하나도 잘못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사라를 공식적으로 아내로 삼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우기 아비멜렉은 떳떳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항변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라”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벌을 내리러 아비멜렉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비록 모르고서라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아비멜렉을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죽으리라’라고 하셨던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의 선고이기 보다는 강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벌을 위해서 형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멸망을 위해서 멸망을 선고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수많은 예언이 등장하는데, 그 예언들의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저런 죄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벌을 내리겠으며 너희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은 전혀 변할 수 없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돌이키기만 한다면 심판은 취소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형벌과 멸망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께서 그 예언이 실패하기를 바라면서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우리가 짓고 있는 죄에 대한 강한 메세지를 만날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죄는 그 죄 자체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가운데로 몰고갈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징벌을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분노보다는 사랑이 더 큽니다. 우리가 더 악해져서 하나님께서 정말 매를 드시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책망은 그 책망이 크면 클수록 그 속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우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항상 우리에게 선대하시고 은혜만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읽는다면 오히려 그런 말씀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은혜를 줄 것이고 또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유혹을 그 사랑과 은혜의 능력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이 사건을 종결지으십니다. 아브라함의 잘못 때문에 아브라함이 위험해 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신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이 너를 위해 기도해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은혜가 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함 이기도 합니다. 은혜란 항상 이유가 나에게 없는데 내가 받는 복이고, 때로는 큰 죄 중에 더 크게 경험되기도 하니까요. 만약 이런 은혜가 없다면 아브라함처럼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언약에 신실하신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고, 또 앞으로도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불안합니다. 그냥 보기에는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며, 옳지 않은 방법을 취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도 지킬 수 있고, 또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죄가 만들어 내는 악한 결과들이 흘러가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