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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0.20. 주일오전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마가복음 48)



막1023to27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마가48).pdf


20131020SM (#01)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23-27절



제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지금 한참 시끄러운 사랑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 전에는 강남에 있는 모교회에 다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스물 일곱 살이 되던 해까지 그 교회에 출석했는데, 그 시절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이기도 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서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의 메세지는 형식적으로 볼 때는 세련되고 나무랄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는 전혀 성경과 맞지 않았고 이것이 예배 때마다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메세지는 항상 똑같았습니다. 처음과 중간은 달라도 결론은 항상 “예수 믿으면 잘 된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인 복도 받고 성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내용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전체의 지극히 일부분이고 또 성경이 항상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의 메세지는 항상 그랬습니다. 이렇게 메세지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그런 메세지 때문에 성도들의 신앙이 왜곡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메세지를 그 교회에 다니는 부유한 성도들도 들었고, 또 가난한 성도들도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메세지를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양쪽에서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부자 성도들은 이미 부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복은 예수 잘 믿는데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라는 메세지가 울려 퍼집니다. 그러니, 비교적 부유한 성도들은 자기 신앙에 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누리고 있는 부유함을 보니 내 신앙에 문제가 없는 모양이구나.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있구나.”하고 말입니다. 가난한 성도들도 똑같은 메세지를 들으면서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지금 가난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예수를 믿었지만 자신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입니다. 그러면 이런 분들은 자기를 정죄하고 좌절하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내 신앙에 문제가 많구나.”하고 말입니다.  이 분들은 그런 메세지 때문에 이중으로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세지가 청중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오해에 빠지게 만들었고, 양쪽 모두를 영적인 피해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아주 좋은 질문과 나무랄데 없는 겸손함과 진지함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던 부자,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답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답을 마음 속에 담은 채로 슬퍼하며 근심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 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답을 따르기에는 너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를 너무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아간 후,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그런 심정으로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재물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런데, 재물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과 너무나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그렇게 나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만약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그들에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자들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실례를 그 부자를 통해 똑똑히 보고 난 이후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그리 놀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놀랐습니다. 한 번 생겨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아무리 그게 틀리다는 증거가 눈 앞에 보여도 그것은 좀처럼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고정관념이란 증거가 눈에 보여도 그 증거를 볼 수 없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 문장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두 문장입니다. 첫번째 단어부터 ‘얼마나 어려운지!‘까지가 하나의 감탄문으로 되어 있고 ‘낙타가...’로 시작되는 부분부터는 또 다른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먼저 누구에게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후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그러니까 아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 아랫목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아직은 진짜 놀랄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부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며, 부자들에게는 아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 부자를 대표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통해서 주신 교훈이 모든 부자에게 전부 다 해당되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부자는 특수한 상황에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영생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영적인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다하고 생각했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을 냈던 사람이구요. 그렇게 보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섬기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늘보다는 땅이 더 중요하고, 영생을 얻는 일보다는 부유함을 누리는 일이 더 중요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의 ‘부자’는 실은 그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적인 풍요함을 목적으로 삼고 거기 의지해서 살아가거나 혹은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그야 말로 경악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이제 겨우 열리기 시작한 하늘나라의 문을 다시 꽁꽁 걸어 잠그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누가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그 때, 다시 하늘 문이 열리고 복음 중의 복음이 들려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부자는 물론이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도 자기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고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십니다. 낙타 뿐만 아니라 코끼리도 바늘귀로 지나가게 해 주십니다. 부자들이 낙타라고 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크기로 친다면 고양이나 생쥐쯤 될지도 모르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거기 기대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낙타든 생쥐든 바늘귀로 지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구원이 단 0.00000001퍼센트라도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구원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그 바늘귀를 통과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성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은혜라는 말을 하나님 쪽에서 표현하면 그것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부자들에게는 활짝 열려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열려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문을 꽁꽁 걸어잠그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히셨습니다. 아니, 아얘 그 문을 없애버리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누구도 다시는 닫지 못하도록 은혜로 열어버리셨습니다. 할렐루야! 만약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그 어떤 사람도 나는 구원받았다고, 나는 하늘나라의 백성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부자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많이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구원은 누구에게나 100퍼센트 은혜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100퍼센트 은혜로 들어가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도 나라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도 다 그렇듯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되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실은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우리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고 또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 아래에 있는, 하나님이 완전히 왕이 되시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곳이 아무리 좋은 나라이고 또 우리가 보기에 완벽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히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이 왕이 되시는 나라가 아니라면 그 나라는 절대로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 기꺼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에 순종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은혜로 열어주셨습니다. 활짝 열어 재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변화되어야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땅보다는 하늘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돈보다는 하나님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땅 위에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구원을 얻는 어떤 조건이나 공로로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모 국회위원이 내란음모 예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뭐 다른 것은 어떻다고 하더라도 다 자란 어른이 어떻게 그렇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또 모여서 그런 이야기들을 했는지 참 한심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사상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사람이 한 행동과 말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그것은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어떤 이유로건 정상참작이 안되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국가 정체성이니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이 아닌 그런 것들을 섬기고 거기 기대어 산다면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문이 아무리 활짝 열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으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는 것은 돈으로 대표되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만에게만 허락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에게만 허락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런 변화가 시작되어야 하며, 또 예수를 믿을 때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부자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으신 채로 그냥 바늘귀로 통과시키실까요? 제가 좋아하는 C. S. 루이스라는 분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이런 익살스럽지만 의미심장한 시를 썼습니다. “모든 것들, 예를 들면 바늘 귀를 통과하여 나가는 낙타의 여행이 가능하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낙타가 어떻게 억지로 빠져 나갔는지 상상해 보라. 꼬리에서 코에 이르기까지 긴 피투성이가 된 실 가운데서.”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려면 낙타는 엄청난 다이어트를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덧붙여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실처럼 가늘어지는 다이어트를 말입니다. 이것이 과연 낙타 자신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낙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실처럼 가늘어 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낙타가 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하며 순종할 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께 찾아왔던 그 부자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부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 예수님,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죠? 저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정말 말씀대로 하기가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하면 좋죠?”라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예수님은 끝까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당장 포기하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만 말씀하셨을까요? 분명히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얘야, 이제 알겠니? 영생은 네가 네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특히 부자인 너,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너는 그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단다. 네 속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더 간절한 소원을 회복하거라. 땅의 재물보다 하늘의 보화를 더 가치있게 여길 수 있는 그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거라. 그러면서 나를 따르거라. 변화를 소망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나를 따르거라. 내가 낙타가 실이 되게 해주마. 그래서 너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마.”하고 말입니다.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면 아마도 이 이야기는 모두를 기쁘고 은혜롭게 하는 해피엔딩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모두에게 꽁꽁 닫힌 문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문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바늘귀 앞에 낙타였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그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그 문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그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 기꺼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문은 다른 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그 분이 왕 되셔서 온전히 다스시리는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쩌면 땅의 재물보다는 하늘의 보화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돈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온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실망하며 힘들어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활짝 열려진 하늘 문 앞에서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늘문을 여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듯이 그런 영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우리들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이며 또 좌절하거나 자신을 정죄하지 않고서 주님을 따라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완전히 닫혀진 하늘문을 여시는 것도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낙타를 실이 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서 주님을 따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변하는 그 변화를 소망하시면서 기꺼이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빚어가실 것이고, 그래서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만들어 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먼저 내 힘으로 열 수 없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시고, 내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변화를 시작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2. 그리고, 우리가 이 변화를 포기하지 말도록,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내 안에 기적같은 변화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