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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3.10.27. 전교인 기도회 -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2


계0212to17 -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2).pdf


20131027SE (#0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2-17절


오늘은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주님께서 칭찬할 것도 있었고 반대로 주님의 책망을 받을 것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버가모 교회는 굉장히 현실적인 교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주님의 칭찬도 받았고 책망도 받았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았다는 것은 나중에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칭찬하실 것은 칭찬해 주시고 또 책망하실 것은 책망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중 책망을 받았던 교회들은 우리에게 마지막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인 긴장을 줍니다. 이 긴장을 선용한다면 우리가 그 날 받게 될 칭찬이 더 늘어나고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이 더 커지는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나머지 부분을 살피기 전에 지난 시간에 잊고 지나간 부분이 있어서 그것 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른 교회들의 경우처럼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시면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이름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스스로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좌우에 날선 검이라는 말을 들으시면 생각나는 것이 있으시죠?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전신갑주 중에서 유일하게 공격무기가 되는 것이 바로 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말씀을 주님께서 들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편에서서 주님께 순종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는 주님의 능력이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우리를 책망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서 ‘양날의 검’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칭찬하시고 또 우리를 돕기도 하시며 복 주시기도 하시지만,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특히 두번째 경우와 관련하여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책망하고 또 바로잡는 지혜를 꼭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말씀을 통해 작게 작게 책망하고 바로잡아 나가면 나중에 크게 혼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를 주님의 두번째 책망은 그들 가운데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율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 더 이상의 신앙적 의무는 남아있지 않으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믿음은 있다고 하면서도 삶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 바로 이런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고 엄하게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서슬퍼런 말씀의 검을 성도들을 책망하시고 바로 잡으시며, 징계하실 때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런 모습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말입니다. 


요즘은 훨씬 덜해졌지만 십수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교단에서는 목사님들이 야고보서를 설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실제로 야고보서를 설교하셨다가 고소를 당하셔서 재판을 받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행위구원을 설교한다고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야고보서는 그렇게 오해되어 왔습니다. 심지어는 루터는 이 야고보서가 지나치게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성경 중에서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말하며 성경취급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우리의 신앙과 구원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성경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비유가 나옵니다. 


한 걸인이 길에서 배가 고파 떨고 있습니다. 그 때, 한 부자가 지나갑니다. 부자는 그 걸인을 무척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그에게로 다가가 덥썩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님, 여기서 왜 이렇게 떨고 있죠? 빨리 옷을 입으세요. 집으로 가셔서 몸을 녹이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얼마 안 있어 또 한 신사가 지나갑니다. 그도 역시 이 걸인을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그 또한 너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님, 배가 고프시죠? 정말 많이 시장해 보여요.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빨리 집으로 가셔서 식사하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사실 이것은 야고보서 전체를 대변하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 그런데 그 믿음이 진정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에는 구체적인 열매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얻는 믿음과 일하는 믿음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그것을 주님은 믿음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열매가 없는 나무를 좋은 나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니골라 당이라고 하니까 뭐 이마에 뿔달린 사람들인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이 사람들은 그저 믿음과 삶이 따로 놀면서도 전혀 그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점점 이런 모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종교는 있지만 믿음은 희미해져 갑니다. 지식은 있지만 순종은 드물어져 갑니다. 말은 있지만 행동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들이 주님 보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들일까요? 


우리가 좋은 신앙을 가지려면, 우리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돈을 사랑하는 문제, 적당하게 타협하는 신앙, 그리고 행함이 없는 종교만 있는 신앙은 “나도 사람인데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슬쩍 넘어갈 수 있을만큼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검을 들고 친히 우리와 싸울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말할 수 없이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 잘못으로부터 돌이키지 않을 때에는 어느 순간부터는 가차없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교훈과 책망을 듣고 돌이켜서 끝까지 이 싸움을 견디어 내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집니다. 첫째로 주님은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나가 무엇입니까?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양식입니다. 40년동안 그들을 단 한 번도 배고프지 않게 해 주었던 하늘의 양식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것이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내어주신다는 것은 그 동안은 그 누구도 맛보지 못했던 영혼의 만족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산상수훈의 약속이 비로소 이런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지며 범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은 이 연약함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범죄함을 떠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 그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경고하시고 엄하게 꾸짖으시는 것은 진짜로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다시 한 번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잘못에서 돌이키라고 말입니다. 혹시 오늘 돌이켜서 회개해야 할 것이 생각나시거든 잊지 말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복의 통로입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고, 그 분이 주시는 좋은 것을 받게 되는 통로입니다. 이 통로가 자주 사용하셔서 막히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은 이기는 그에게는 또 흰 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흰 돌은 유대인들에게는 치료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세계에서 흰 돌은 어떤 사람의 무죄평결을 위한 투표에 사용되었습니다. 흰 돌을 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끝까지 이긴 자들에게는 모든 아픔과 슬픔, 고난을 치유하시는 치유자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완전히 정결한 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며 끝까지 순결함을 잃지 않은 교회와 성도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들의 치료자가 되어 주시고 위로자가 되어 주시며, 이들을 정결하다고 인정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흰 옷 입은 주의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이렇게 고생하며 예수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영광스러운 칭찬을 바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목표가 여기에 있다면, 기왕에 예수 믿을 것, 주님의 기준에 맞추어 예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순결함과 정결함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큰 어려움이 와도 인내해야 하니까요. 항상 내 믿음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하니까요.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며 분별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흰 돌을 주신다고 하셨고, 그 흰 돌 위에는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인데, 그 이름은 그 흰돌을 받은 사람 밖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새 이름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름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까지는 그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며 그 이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원래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양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합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그 의미와 가치가 전혀 달라집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실 이름은 아마도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름이고,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끝까지 이긴 자들에게만 주실 이름이니 그 이름은 영광의 이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때, 주님과 나만이 아는 새로운 이름으로 나를 부르실 것입니다. 아무도 알 수 없게 비밀스럽게 그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부드럽고 기쁜 음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목소리와 그 이름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이름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 영광과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가 그렇듯이 성도도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러한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한 치열한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끝까지 이 싸움을 싸워서 주님으로부터 “끝까지 이긴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주님과 우리만 아는 흰 돌 위에 새겨진 그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듣게 되는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