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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1.08. 금요기도회 -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사도행전 37)


행0717to36 -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사도행전3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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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7장 17-36절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스데반의 설교는 원래는 설교가 아니라 자신을 심문하는 법정에서 이루어진 자기 변호입니다. 공회는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뜯어 고치겠다고 했다는 거짓 고발을 받고는 스데반을 소환했고, 스데반에게 그 고발이 사실이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공회에서 한 이야기 속에는 모세와 성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고, 오늘 본문에도 그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계속해서 그 두 가지 이야기 속에 복음을 담아 자신의 동족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스데반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는 동일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조상들은 요셉을 거부하고 그를 애굽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그 가족을 구원하시고 또 양육하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인 모세를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다시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핍박에서 구해주시고 애굽으로 부터 해방되게 해 주셨습니다. 스데반이 두 이야기 속에서 들려주는 메세지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불순종,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왜 이 이야기를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조상들처럼 예수님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을 거부한 스데반의 동족들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거부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런 일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정말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얼마나 자주 거부했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들을 모두 붙들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정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견고해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도 그만큼 풍성해져 있을 것이고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듯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거부할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듭 거듭 은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애씀과 노력도 있었고, 그런 것들 또한 오늘의 우리의 믿음을 위한 재료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자신의 동족들에게 그들 자신의 불순종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그것을 지적하고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빨리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너희들이 메시야를 죽이고 구원을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그 기회를 붙들라고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비록 과거에 우리가 놓쳐버린 안타까운 은혜의 기회들이 많다고 해도 이제부터 다가오는 기회들을 잘 붙들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이것이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이며, 또 출애굽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악행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잘 양육해 가셨습니다. 애굽을 인큐베이터로 사용하셔서 이제 막 태어난 70명 남짓한 이스라엘을 큰 나라로 성숙시켜 가셨습니다. 무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제 애굽에서 나가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바로 그 때 애굽에는 왕조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는 항상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과거의 흔적들을 모두 지우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급작스럽게 불어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 생겨나 아직 자리를 확실하게 잡지 못한 왕조에게는 불안한 요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제 이스라엘의 좋은 시절이 다 끝나고 고통스러운 시절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새 왕조는 이스라엘을 멸족시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은 모두 나일 강에 던져 버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이렇게 한 세대가 지나가면 이스라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건져낼 구원자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이 아이도 나일 강의 악어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지만 누나의 지혜로 애굽의 공주의 품에서 성장해 가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의 품에서 양육되었듯이 모세는 애굽 공주의 품에서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애굽이라는 곳을 이스라엘을 위한 요람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물론 어머니 요게벳 덕분에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서 말입니다. 아마 모세는 왜 자신이 히브리인으로 태어나서 다른 아기들처럼 죽지 않고서 구출되었으며 또 그렇게 궁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민의 해답은 모세가 문득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매를 맞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당장 뛰어 내려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동족을 구해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찾은 소명이었습니다. 핍박받는 동족의 구원자가 되는 것 말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동족을 구해주면 동족들이 자신을 구원자로 여겨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동족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주제 넘게 자기들 일에 끼어드는 ‘감 나라 대추 나라.’하는 팔자 좋은 변절자 쯤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오히려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하며 이제는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모세를 비아냥 거리며 거부했습니다. 이미 모세가 애굽의 감독관을 죽인 일이 동족 중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가 바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모세는 그 길로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야 말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갑니다. 양치기가 되어 살아가던 모세에게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후, 대뜸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라고 신발을 벗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모세를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자로 파송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이제 이렇게 해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자로 보내지고, 또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참 이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핍박을 당하기 시작할 때 이스라엘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모세가 젊은 시절, 훨씬 기력이 충분할 때 그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섰을 때 그를 사용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모세는 40년 동안 목동 노릇이나 하면서 광야에서 지내게 하셨고, 왜 이스라엘은 그 40년 동안 모진 핍박을 당하게 내버려 두셨을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되었으면 그냥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지 말입니다. 그것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 다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의욕이 충만할 때, 그리고 기력이 가장 왕성할 때 그를 사용하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이끌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40년 동안 왕궁에서 고이 고이 자라났으니까요. 물론 거기서도 모세는 지도자로서 실제적인 훈련을 많이 받았고 또 충분한 지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그에게 아직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목자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행동할 줄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완고하게 반항하면서 불순종할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약에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그런 마음만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는 그의 지팡이로 날마다 백성들을 두들겨 팼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양을 진실로 사랑하는 목동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의 목동이 되는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양의 이름까지 아는 목동, 고집불통인 양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목동, 자기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양을 지킬만큼 양을 아끼는 목동이 되는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요셉 덕분에 400년 동안 별 고생 없이 애굽에서 그야 말로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이미 약속의 땅에 대한 생각이 흐릿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또 애굽이 이미 그들의 가장 익숙한 삶의 터전이 되어 있었구요. 이제 그들이 스스로 그 곳을 떠날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애굽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왕조는 첫번째 왕부터 이스라엘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왕조가 세워진 시기와 이스라엘 민족이 갑작스럽게 번성하여 큰 나라를 이룰만큼 커진 시기가 겹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두 일의 타이밍을 맞추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핍박이 시작된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이 보여주듯이 그들은 자신들을 도우려는 사람을 곡해해서 거부하고 멸시할 만큼 아직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구원이 정말로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세를 억지로라도 지도자의 자리에 앉히려고 들었겠죠. 그 후에 이어진 40년간의 고난의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을 향해 구원을 부르짖으며 약속의 땅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세월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를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그 때 그들 사이에 뛰어들어 내가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서 보내신 구원자라고 주장며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모세는 영원히 거절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중에 모세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이 말 그대로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약속의 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모두에게 그 40년은 심한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됨을 회복해 갔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참 목동으로 만들어져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댇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할 자를 훈련시키시고 보내셨던 분도 하나님이시니까요. 


구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대로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그저 애굽에 익숙해져서 살아갔던 것처럼 사람들 또한 이 땅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하늘나라를 잊어버리고 죄악이 주는 달콤함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구원자를 보내주어도 그 구원자를 거부합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그랬고, 그들의 후손들이 선자자들에게 그렇게 했으며, 결국 그들은 예수님마저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매 구원에 대해서, 약속의 땅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약속의 땅에 대한 꿈을 깨우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까지 준비시킨 후에, 다른 쪽에서 준비시킨 구원자 모세를 보내셨듯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매 약속하신 마지막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함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이 했던 일이라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거부하고 또 거절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이미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들어와 있지만 얼마든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행했던 잘못들과 비슷한 잘못들을 또다시 반복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주시는 회복의 기회, 충만한 은혜의 기회를 무시하고 내가 행하던 대로,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대로만 하려고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하였든지 간에, 얼마나 많은 은혜의 기회를 자신의 부주의함과 게으름 때문에 놓여왔든지 간에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절실해 지고 민감해 져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구하게 만드실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확실하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때, 반드시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어떤 은혜의 기회가 놓여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처럼 보여도, 흔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을 붙들기 위해서 은혜의 기회를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무시하고 그것을 놓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의 이유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순간 어떤 은혜의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그 때가 그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놓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붙들 때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주실 때 받는 것이 최고로 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절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를 기다리면서 그 때에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만으로 풍성한 참 이스라엘의 삶을 살아기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