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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1.15. 금요기도회 -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을 항하여(사도행전 38)



행0737to43 -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을 향하여(사도행전3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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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7장 37-43절


미국 최고의 부자가 누구일까요?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전 회장인 빌게이츠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부자는요?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는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식투자의 달인입니다. 아무리 불확실하고, 또 침체된 경제상황일 때라도 투자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니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정말 유명한 사람이고 정말 수많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만나기를 소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에 그런가 하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하는 아주 독특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경매에 붙이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렇게 했는데요. 올해는 그 낙찰가격이 사상최고의 액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게 얼마일까요? 무려 346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40억원이나 됩니다. 어마 어마하죠. 정말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놀랄만한 일은 이 사람이 이런 이상한 일을 하는 이유인데요. 이 사람은 이것을 돈 벌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식사기회를 판매한 돈은 전액 자선단체에 보내져서 저소득층을 지원하는데 사용된답니다. 이 사람이 이 일을 한 것이 벌써 13년 동안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그렇게 기부한 돈이 1460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171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미국의 거부들과 더불어서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말자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 아름다운 부자, 그리고 부자다운 부자입니다. 탈세와 불법을 일삼으면서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기를 쓰는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들하고는 격이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부자인 것은 그게 자기 노력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물려받아 그렇게 된 것이든 커다란 특권임에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특권을 형식적으로 붙들고 있으면서 거기 집착하는 것과 진짜로 그 특권이 주는 유익을 누리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자신의 특권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붙들고 있을 때, 그 특권은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가진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특권, 그리고 영적인 특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그런 특권이 없다면 더 좋은 그런 상황이 만들어 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특권 자체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 하게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열 두 조상으로 그리고 요셉을 거쳐서 모세까지 왔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한 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불신앙과 불순종에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영적으로 안전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다른 민족들은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수많은 시련과 침략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지켜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습니다. 그저 지니고 있으면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단지 그렇게 하는 것에만 예민하게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 두 가지를 건드렸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흠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스데반을 무너뜨리려고 그 죄목으로 거짓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자기 변호 대신에 자기 동족에게 복음을 들을 준비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무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물, 그 공간만을 거룩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스데반은 떨기나무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 그렇게 본다면 온 세상이 신발을 벗어야 할 거룩한 공간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를 통해서 이 세상 모든 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또 이 세상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즘 제가 예배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드립니다만, 내가 예배드리는 장소에 있고, 또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아무런 유익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자리, 이 시간에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며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소망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소망에 응답하실 때, 비로소 우리가 있는 그 곳은 참된 예배의 장소가 되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안타깝게도 똑같은 공간 안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예배 드릴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하소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이게 제 소원입니다. 가장 간절히 바라는 소원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이 이 예배당 안이 불꽃이 타오르는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될 수 있으며, 내가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하고 또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참 은혜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우리 모두를 위한 호렙산, 그 떨기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릴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기 오셔서 그 자리에 앉으실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 예배자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누리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스데반은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스데반이 이 부분에서 지적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모세를 진짜로 무시한 것은 자신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었고, 또 지금 스데반을 심문하는 공회원들 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너희 조상들처럼 모세와 함께 있다고 하면서도 전혀 모세를 존중하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모세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유익을 다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데반은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기 이 사람이라” 스데반은 모세가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이미 왔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유대인들은 누구를 무시하고 거부한 것입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하나님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그 사람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붙들었던 것이 모세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모세라는 인물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모세라는 인물이 아니라 모세가 전해준 말씀을 편견없이 받아들였다면, 그리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다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저 형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스데반은 지금 공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조상들이 왜 광야에서 그렇게 크게 범죄하고 영적인 실패를 경험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겉으로 보기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거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세를 거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모세를 거절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간단계로 선택한 일에 불과했습니다. 모세를 거절한 진짜 동기는 그들의 마음이 애굽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애굽을 향해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와서도 그들이 애굽을 생각하며 그리워 했던 이유는 그들이 거기서 섬겼던 신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한 마디 말 속에 그들이 속마음이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십니다. 기도도 들어주시고, 또 능력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십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며, 특히 사람들의 욕심을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신들도 제물을 원하고 예배를 원하지만 그 신들은 그렇게 해 주기만 하면 만족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든 전혀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들은 계획이 없습니다. 선하지도 않으니 자신들의 선한 뜻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제일 좋은 것은 아무리 욕심을 부리고 탐욕대로 살아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태클도 걸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은 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신이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을 그들의 뜻대로 인도할 그들을 위한 신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우상을 만들고는 자신이 만든 것을 향해 자발적으로 제사를 드리며, 그 우상을 기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딴판입니다. 인간은 원래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라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기 욕심을 편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공회당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실은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저질렀던 죄와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광야의 이스라엘이나 공회당 안의 공회원들이나 똑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던 메시야,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는데도, 자기 조상들이 모세를 거절했던 것처럼 거절하고 또 죽이기 까지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낸 우상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정말 그랬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아니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저 ‘아도나이’ ‘나의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 그 아도나이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낸 하나님을 빙자한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을 섬기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그 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광야의 이스라엘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금송아지를 향해서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지 못할 정도로 거룩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신앙의 겉모습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 신앙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42절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한 결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셨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외면했다니 말입니다. “그들을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과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기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든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기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냥 그들이 그 헛되고 추한 우상을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외면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껍데기나 형식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름만 불리시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알맹이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중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진짜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만 기뻐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게 되면 신앙이 알맹이를 잃어버리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껍데기만 붙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맹이로 착각하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비극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수많은 영적인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많은 조건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것, 정통교단에 속해 있다는 것,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 수 십년 동안 신앙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 등등… 우리에게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나 율법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이런 것들로 충분할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옷에 불과합니다. 좋은 옷을 입었다고 그것이 곧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듯이 이런 저런 좋은 옷 속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도 충분한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영적인 특권은 제대로 누려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맞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하며, 항상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면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저 말씀을 아는데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우리에게 허락된 영적인 특권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절대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며 진짜가 되어서 진짜가 누리는 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나에게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 그 부분을 처리합시다. 그 껍데기 안에 알맹이를 채워 넣으십시다.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우리가 이미 떠나온 애굽을 향한 부분이 있다면 이제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듭시다. 


우리 모두 제대로 된 껍데기 속에 제대로 된 알맹이를 가득 채워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특권들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참 이스라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