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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1.22.금요기도회 -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사도행전 39)


행0744to53 -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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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7장 44-53절


사람은 항상 손에 딱 잡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언가 불확실한 부분이 있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부분이 있을 때는 그것 때문에 불편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런 것들을 모두 확실해지고 자기 손 안에 들어왔다고 여겨지게 만들어 놓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은 그게 무엇이든 진짜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 자기 건강, 재물, 자기 자녀, 자기 생각, 심지어는 숨을 쉬는 일까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닐지라도 실제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알고 있는 한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신 이유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독립선언을 한 후에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쥐고 살아가기 위해서 애써왔습니다. 


그런 노력은 심지어는 영적인 부분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의 손이란 인간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까지도 자기 손에 쥐고서 마음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마음이 우상을 만드는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까지도 알려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우상을 섬길 때와 비교해서는 훨씬 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그 습관을 내던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우상처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 가지를 마치 우상처럼 만들어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대신 섬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 두 가지가 자신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그렇지만 모든 질병에는 전조증상이 있듯이 사실 무엇인가가 우상이 되어질 때, 항상 함께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마약 이스라엘이 그 증상들을 살필 줄 알았다면 그들은 그 소중한 두 가지를 우상처럼 섬기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우상이 되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의미와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고, 또 생명을 잃어버려서 돌처럼 굳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상처럼 되어 버리자 그것을 지키는 일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보다도 더 중요해져 버렸고,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또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 하나 그저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성막을 대신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고 또 분명히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마치 하나님과 성전이 똑같은 것인 양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성전이 있으면 항상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뒷전이고 온통 성전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생각해 본 내용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율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율법을 무시하고 모세를 무시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그 다음 문제, 그러니까 성전문제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거슬리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이야기인 즉 너희들이 성전을 신주단지 모시듯하고 있지만 사실 성전은 애초부터 잘못 지어진 필요없는 건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던 잘못 지어진 건물이라니 지금 우리가 듣기에도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질 만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의 때까지 이르니라” 유대인들은 지금 성전을 가지고 난리를 치며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애초에 꼭 지어져야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에게는 성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지어야 한다고 그 형식과 구성을 정해 주신 것은 성막이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그저 성막을 본 떠서 만든, 어찌보면 성막의 카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성막이 있는데도 성전이 세워져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는 성막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은 그 성막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이 말이 실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웅장하게 지어진 성전에만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스데반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충분히 경험하고 목격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증거의 장막’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은 분명히 성전이 아니라 성막, 그러니까 텐트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텐트가 무엇입니까? 이동식 가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정된 가옥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동식 텐트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어디에도 묶이실 수가 없는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자유로운 분이시며, 또 한 장소가 아니라 그 어디든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로 만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건물이 아니라 텐트를 만들라고 하셨던 것은 그러니까 나를 어디다가 묶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기독교 백주년 기념교회를 섬기시는 이재철 목사님께서는 젊은 시절 스위스 한인 교회를 섬기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스위스에는 아주 유명한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는데, 한국의 성도들 중에서도 한국에서 스위스까지 그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 찾아가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한인 교회를 섬기고 계시니 그 분들은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 들르게 되고, 이재철 목사님은 그 분들에게 “왜 그 공동체에 가려고 하십니까?”라고 묻곤 하셨는데, 가장 많이 되돌아 왔던 대답은 “네.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이재철 목사님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셨답니다. “아니. 하나님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다고? 그럼 한국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스위스를 더 좋아하셔서 스위스에 가야만 만날 수 있습니까? 한국은 공해가 심하고 답답해서 주로 거기만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도 없는 광야의 호렙산 그 빈약한 떨기나무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장소로 만들 수 있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든 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곳은 그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실 하나님께는 성막도 필요 없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쉽게 말씀드려서 이스라엘이 그것을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만들라고 하신 것이지 하나님께 다른 의미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 어떤 장소가 꼭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성막 하나면 차고도 넘칩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성막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해서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산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장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성전이나 혹은 어떤 정해진 장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령 안에서 진리를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을 성전으로 삼아 거기 거하시기를 즐거워 하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느 곳 그리고 어느 순간도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성전은 불필요한 장소였습니다. 성전은 그저 다윗이 진심을 가지고 조르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마지 못해 허락하신 곳이지 하나님께 필요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스데반은 이사야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을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온 하늘은 그저 그 분이 앉으시는 보좌이며 온 땅은 다 합쳐도 그저 그 분이 발을 올려 놓는 곳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크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원래부터 사람이 이런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드린다는 생각 자체가 웃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신 분이 어찌 인간이 그 작은 손으로 만든 건물을 거처로 삼아 영원히 거기만 계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 작은 성전에만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 그 것 때문에 성전만을 거룩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성전을 하나님 처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동족들에게 바로 이것을 피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데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 놀랍게도 그들이 우상처럼 만들어 버린 율법과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기에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사람들이 절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땜누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에서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스데반은 공회를 향해서 그들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을 받고서도 그 율법이 말하는 바를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야 말로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며, 율법을 가지고 있고 성전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꾸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다른 것을 끼워 넣으려고 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원히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결국 그것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그것을 붙드느라고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막을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주 오래된 소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 있어도, 또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만약에 그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모든 일은 정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에서 혼자 있거나 그저 길을 걸을 때에라도 그 때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바로 그 곳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의 자리,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 됩니다.


원래 하나님은 온 우주보다 크신 분이시니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기에 충분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한 곳 그런 곳이 있습니다. 황송스럽게도 그런 하나님께서 거처로 삼기를 원하시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 가운데 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 교회 공동체 안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그저 우리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충만히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모인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를 갈망할 때, 하나님의 법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 하고 또 그 안에서 살기를 진심으로 소원할 때,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백성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복을 허락하십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우리가 예배라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우리나 하나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집을 지어놓기만 하면 집 주인이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듯이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형식을 붙들고 거기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아 서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 대답해 드려야 합니다.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라고,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성전이 되기를 소원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이니까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시라고 대답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정말 영원히 거하시도록 빨리 그 분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텅 비어있는 집과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가득 찬 그런 공동체로 거듭나게 되어야 합니다. 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을 지키는 것, 모양을 붙드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임재하심 가운데 사는 것,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리심 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전부이고 그래서 그 분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성령충만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처로 지어져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