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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1.28. 새벽예배 -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세기 90)


창2527to34 -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라(창90).pdf


20131128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25장 27-34절




사람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있고 또 성향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복잡한 반면에 어떤 사람은 단순합니다. 어떤 사람은 활동적인 반면에 어떤 사람은 정적이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은 우직한데 또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아주 잘 돌아기기도 합니다. 일방적으로 어떤 성격이 좋다고 하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성향은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성향을 더 많이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든 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로 지내왔든 간에 예수를 믿게 되면 그것만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진 성향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데 장애가 되는 성향이 있다면 적어도 그 성향 때문에 참된 신앙으로 가는 길이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는 잘 훈련하고 또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성향과 스타일은 많은 부분 타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성향은 완전히 바꿀 수도 없고, 또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하나님을 다른 모습으로 더 풍성하게 섬기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서 성향마저도 우리의 삶과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성향을 잘 살펴야 하고 또 그 성향을 보강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 부분 때문에 신앙의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기한이 다 되어 리브가는 해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가 나왔는데 전신이 붉은 털로 뒤덮혀 있었습니다. 마치 작은 곰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붉다는 뜻의 에서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뱃속에서도 둘이 싸우더니 나오는 모습도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에서가 먼저 나오자 선수를 빼앗긴 둘째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잡다’는 의미를 가진 야곱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참 이상한 아들들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털많은 괴물같은 아들이었고, 또 하나는 나면서부터 남의 발꿈치나 잡고 늘어지는 비열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극적이게도 이 두 아이들의 미래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해서 언제나 들로만 돌아다니면서 짐승들을 잡아오는 들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성품이었기 때문에 항상 집 안에 머물면서 어머니 리브가를 도왔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자녀를 더 마음에 들어할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아버지들은 아들이 아들다운 것을 좋아합니다. 여자아이처럼 집에서 어머니나 졸졸 따라다니며 집안 일을 거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딸같은 아들을 더 좋아합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그랬습니다. 이삭은 장남이자 아들다운 에서에게로 마음이 기울었고, 리브가는 자신을 잘 도와주는 야곱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문제는 이 기울어짐이 너무나 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분명히 둘 다 사랑을 받고 있지만 다른 쪽 부모에게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 부모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자식들을 다른 쪽 부모와 갈라 놓고 또 형제사이를 더 갈라 놓게 됩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신들의 한 자녀 쪽으로 기우는 애정과 성향을 그대로 노출시킬 것이 아니라 잘 다스려야 했습니다. 원래 배속에서부터 다투던 두 아이들을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중재자의 역할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그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기우는 쪽의 자녀를 계속해서 더 편애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형제지간의 비극은 그런 절제하지 못한 편애가 만들어낸 첫번째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팥죽을 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형인 에서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여기 저기 쑤시고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느라고 너무 허기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야곱이 쑨 죽을 보자 마자 그것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뭔지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붉은 것’이라고 부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너무 기쁘게 한 사발 죽을 퍼서 형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아주 맛있게 몇 그릇을 비웠습니다. 원래 정상적이라면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데, 본문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도저히 형제지간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의 요구를 받은 야곱은 형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내가 이것을 줄테니 그럼 형은 나에게 장자의 권리를 줘.”라고 말입니다. 머리가 좋은 야곱은 형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고 즉흥적이며 배가 고프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형의 성향을 말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형에게 그런 제안을 하면 형은 분명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야곱은 어쩌면 애초부터 형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 날은 작심을 하고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타이밍과 대사가 이미 준비된 것이라는 냄새가 너무 강합니다. 야곱의 계산대로 에서가 걸려들었습니다. 에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장자의 권리가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 빨리 죽이나 줘라.” 그렇지만 용의주도한 야곱은 거래를 확실히 합니다. 형에게 맹세를 하게 합니다. 무르지 않기로 나중에 딴 말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배가 고픈 것만 생각했던 에서는 맹세까지 하고 팥죽 한 그릇과 빵을 얻었고 그저 그것을 맛있게 먹고는 아무 생각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값싼 장자권 거래가 이렇게 끝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자꾸 장자인 에서의 잘못에게만 집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성경도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자기의 기질과 성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자신의 인생과 가족을 뒤죽 박죽으로 만들어 버린 네 사람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식들을 향한 편애를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감정이 흐르는 대로 자식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별로 좋지 않은 아들들의 관계를 나서서 깨뜨려 버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서는 즉흥적이고 말초적인 욕망 중심의 성향을 잘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장자의 권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어 팥죽 한 그릇과 빵 몇 개에 그것을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장자가 되고 싶다는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고 그 것을 얻기 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팽팽 돌아가는 자신의 머리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전 계획까지 세워가면서 주도면밀하게 형의 약점을 악용해서 형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네 사람은 그 어느 사람 하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 속에서 야곱은 아브라함 집안의 영적인 장자가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식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양쪽 부모의 아들들을 향한 편애 속에서, 그 속에서 자라난 형제들의 갈등 속에서, 통제되고 다스려지지 않은 즉흥적인 본능 속에서, 그리고 형을 속여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려던 동생의 영악한 욕망 속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런 식으로 이루지 않으십니다. 선한 계획이니 선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망가뜨리는 것이 바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성향들이 아름답고 멋지게 이루어져 가야 할 하나님의 계획을 더러운 얼룩으로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광스러워야 할 자신들의 인생에도 오점을 남기고 또 그 후유증에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혹은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니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성향과 스타일이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긍정적이고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하며, 그 일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잘 다스리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살아가는 내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서 평안하고 순적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 자신의 기질과 성향들을 잘 살피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내가 하나님을 더 온전히 믿고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권리처럼 주장하지 않겠다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나의 인생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겠다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성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더욱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져 가는 과정이 되어 내 신앙을 위한 복이 되며, 하나님의 계획을 순적하게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