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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2.06.금요기도회 - 보라 하늘이 열리고(사도행전 41)



행0756to60 - 보라 하늘이 열리고(사도행전41).pdf


20131206FE (#1).mp3.zip





본문 : 사도행전 7장 54-60절



지난 주 금요일에는 스데반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허무하고 억울하며 비참한 죽음이었지만 실제로는 가장 큰 승리였고 성공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도는 사탄의 나라를 박살내기에 충분한 강력한 공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삶과 죽음이 바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믿음이 어떤 사람을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 때, 그 사람은 그가 세속적인 기준으로 성공을 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이 됩니다. 그 날 사탄은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순종한 한 사람으로 인해 다시 한 번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확실히 이길 줄 알았지만 오히려 강력한 역습을 받고 타격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자기를 향해 달려들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아간 세상 전부와 싸워 결국 승리한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만큼 그의 믿음이 대단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의지가 어마어마하게 강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승리하게 만들어 준 원동력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하늘에서 온 기쁨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셨고, 또 서서 응원하시기 까지 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믿음의 기쁨과 그 날 보았던 하늘의 영광이 너무 크고 놀라웠기 때문에 그는 죽음의 위협과 돌에 맞아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담대함과 평온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굉장히 나약해 졌습니다.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서 견디는 강도가 약해졌고 믿음 때문에 무언가를 손해 보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취약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세상과의 싸움에서 굉장히 취약합니다. 때로는 전혀 싸워보려는 의지조차 가지지 못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우리도 옛날의 성도들처럼 똑같은 예수를 믿고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는 우리 선배들에게 있었던 그 강인함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드뭅니다. 사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까지 땅이 전부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돈, 건강, 성공, 쾌락… 이런 것들을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속한 좋은 것들에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을 빼앗긴 성도에게 남는 것은 땅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들 까지도 땅에 속한 것들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붙들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결코 성도들을 능력있는 성도들로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는 한,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은 전혀 우리에게 현실적인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소원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행복이 아닙니다. 건강이나 명예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국 우리를 땅에 묶이게 만들고 그래서 땅을 두려워 하게 만듭니다. 성도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죄에 대해서 취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소원해야 할 것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 나에게 주어질 하늘 영광을 알기 때문에 생겨나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만족 말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기쁨과 영광과 만족을 얻을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땅에 매여서 땅을 두려워 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 그리고 죄의 유혹을 이기는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로서 이것보다 더 복되고 더 능력있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인간적으로 보아도 이것보다 자유롭고 훌륭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옆 집에 있는 금덩어리가 아닙니다. 그림의 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들에게 이미 허락하신 삶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눈이 하늘의 영광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자유롭고 능력 있는, 말 그대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승리는 이 두 가지가 만들어 낸 승리였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주는 샘 솟는 기쁨과 하늘 영광을 보는 넘치는 만족과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그 엄청난 고통 앞에서도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불이익 앞에서도 벌벌 떨고, 나에게 작은 해를 입힌 사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인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마냥 핑계만 대고 있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직접 주시는 기쁨이 있고 이미 보도록 허락해 주신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있고, 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부어주신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땅의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서게 해 주는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까?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이 복과 능력이 있습니까? 이런 놀라운 복과 능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도 누릴 수 있는 복과 능력일까요? 우리는 지금 이런 복과 능력이 우리에게도 허락되어 있으며 또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믿고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믿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놀라운 기록들을 놀라운 마음으로 감탄하면서 읽어내려가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이 진짜로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은혜가 지금 나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성경에서 은혜로운 이야기를 볼 때마다 그것을 소망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구하게 됩니다. 나에게도 그 은혜를 달라고, 그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허락해 달라고 인내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스데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스데반은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아! 스데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그 스데반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을 향해야 하며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그런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또 나도 그 기쁨을 누리고야 말겠다는, 나도 하늘의 영광을 보고야 말겠다는 영적인 욕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 은혜를 알고 또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건 정말 누리기 힘든 은혜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세상에 이런 은혜와 능력을 누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도 우리는 그 은혜를 구하고 그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스데반의 이야기를 여전히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나중이나 똑같은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니까요.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보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말 완전히 다르다고 할만큼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가장 다를까요? 눈빛이 다릅니다. 하늘나라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눈에 힘이 없고 빛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어도 그렇습니다. 눈에 근심과 걱정, 두려움, 그리고 무관심이 서려 있어서 눈이 빛이 나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라보는 것이 뚜렷하니까 눈에 힘이 있고 빛이 납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 두려움이 그 눈의 빛을 가리지 못하며 무관심은 영적인 이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얼굴이 다르고요. 또 움직임이 다릅니다. 기도하는 모습, 예배드리는 모습, 찬양하는 모습, 성도들을 대하는 모습도 다릅니다. 성품도 달라집니다. 땅에 메여 있지 않으니까, 하늘을 바라보며 사니까 이렇게 다 달라지게 됩니다. 


제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제 머리 속에는 가끔씩 이런 질문도 떠오르곤 합니다. “과연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지 않은 사람도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도 영원한 하늘영광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목회자인 저에게 이 질문은 굉장히 심각한 질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도 하늘나라의 영원한 시민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럴 수 없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않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 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이유도 목적도 분명치 않은, 그래서 능력도 없고 시험에도 취약한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저 자신을 보니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을 살펴본 결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기쁨이 없고 목표가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고 넘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여러분이 약하거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여러분에게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늘에서 직접 부어지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그 증거입니다. 엄청난 압박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평안했던 스데반,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심을 다해 기도했던 스데반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를 원치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이 능력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아서 살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스데반이 부럽고 질투가 나지 않습니까? 이런 욕심, 이런 부러움, 그리고 이런 질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그저 착하고 순한 마음만으로는 안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에게도 이런 절실함이 없으면 그는 진짜 은혜와 능력을  놓치게 되기가 쉽습니다.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능력,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다른 그 어떤 은혜보다 바로 이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도 스데반이 알았던 기쁨을 알려 주시고 나도 스데반 처럼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로 나를 이기고 또 세상을 이기는 능력있는 성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허락해 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눈을 활짝 여셔서 하늘 영광을 보게 하시고 마음에는 주님 주시는 기쁨이 가득차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능력과 기쁨 가운데 넉넉히 이기며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