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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2.08.주일오전 -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마가복음 54)



막1113to25 -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마가5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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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1장 12-25절



사람은 두 가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 서로 섞여 있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 속에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고 또 살면서 더 확실해 진 ‘범주’, 그러니까 어떤 것들을 나누고 또 구분하는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차가운 불’이나 ‘뜨거운 얼음’같은 말들을 시적인 표현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일컬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 사람 아니면 하나님 둘 중의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 쪽에 강조를 두십니까? 아니면 사람 쪽에 강조를 두십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하나님 쪽에 강조를 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시고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이라고 보는 편이 더 좋을 듯 싶으니까요. 그리고 왠지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습니다. 그 분 안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함께 했고, 필멸과 불멸이 함께 존재했으며, 무능과 전능이 함께 거했습니다. 시간과 영원이 함께 했고,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공존했습니다. 또 완전함과 불완전함도 함께 있었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아무리 그 분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분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사건은 굉장히 소박하고 겸손한 일이었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대로 되었습니다. 나귀가 매여 있는 장소로 부터 시작해서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의 대화와 그 결과까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대로 다 되었습니다. 알고 계신대로 되었고, 하고자 하시는 대로 다 되는 그런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그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신 그 겸손한 모습 속에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온통 담아 넣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후, 예수님께서는 먼저 성전을 차근 차근 둘러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릴 적에 말씀하셨듯이 거기가 아버지 집이었으니까요. 그 날은 그렇게 저물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만 둘러 보시고는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베다니에서 나오자 마자 갑자기 무척 배가 고파지셨습니다. 그래서 저만치 서 있는 잎사귀 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그 나무에 무엇인가 열린 것이 있는가 하고는 그 나무를 향해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무화과 나무에는 잎사귀만 무성할 뿐, 무화과 열매가 하나도 맺혀있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아직은 무화과가 맺혀질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때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무화과 나무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아마 성경에서 이 사건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사건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셔도 그렇지 어떻게 열매가 맺혀질 때도 안된 무화과 나무를 그렇게 저주하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세난 아이도 아니고 어떻게 배가 고프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셨을까요?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그저 예수님이 인간적이어도 너무나 인간적인 한 명의 사람이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을까요? 


아무튼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마침 유월절이라서 대목을 만나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내쫓으셨습니다. 환전상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장사할 물건들을 가지고 성전으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권위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성전은 원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그런 기능을 해야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드릴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장소가 되도록 계획되었고 또 그것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무리들은 그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각 절기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제물이었죠. 그런데 이 제물은 흠 없고 점 없는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성전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은 제물로 쓸 짐승들을 거기까지 가지고 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잘 키워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먼 곳까지 아무런 손상 없이 깨끗하게 짐승을 가지고 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요. 게다가 제사장들이 돈 때문에 이것을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물의 정결함과 불결함을 판단할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악용해서 가지고 오는 제물마다 퇴짜를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사는 드려야 하는데, 제물은 퇴짜를 맞았고 궁여지책으로 성전 앞에서 구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제물은 의례 성전에서 구입해서 써야 하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제물의 가격은 평범한 짐승의 가격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상인과 제사장들이 이익을 나눠가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성전세’라는 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세가 더 문제였습니다. 성전세는 당시 통용되었던 로마 화폐로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세는 구약시대의 화폐단위로 반 세겔을 바치도록 정해져 있는데다가 당시 로마 화폐에는 시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쓰이지도 않았던 옛날 돈인 세겔을 구입해서 그것으로 성전세를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 화폐와 성전에서 통용되던 세겔 사이의 환전비율이 그야 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부당이득이 생겨났지만 환전상들과 결탁한 제사장 무리들은 여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합법적인 강도들을 만나 부당한 손해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명절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던 것입니다. 올해는 또 얼마나 뜯겨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한 걱정을 하면서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망가져 버린 아버지의 집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또 환전상들의 상을 엎어 버리셨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전 날 지나갔던 길을 지나갈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전날 저주하셨던 그 무화가 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으로는 하루 만에 나무가 그렇게 말라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저거 좀 보세요.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저렇게 말라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베드로는 무화가 나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루 만에 바싹 마른 것이 너무 신기해서 그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되돌아온 대답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믿음과 기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단순하게만 생각하면 베드로가 무화과 나무가 하루 만에 바싹 말라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그런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로는 놀랄 것도 못된다고,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더 놀라운 일도 일어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을 막는 의심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만 잘 처리하라고 주의를 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보다 더 큰 그림 속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 무화과 나무 사건이 성전을 깨끗게 하신 일과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11장 11절부터 오늘 본문까지를 살펴보면 ‘성전-무화과-성전-무화과' 이야기가 이렇게 맞물리며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3절부터 25절까지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적어도 11장 11절부터 25절까지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성전을 상징하는 것이며,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성전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지은 성전이었는데, 정말 어마 어마하게 크고 화려했습니다. 넓이는 14헥타아르 그러니까 평수로 치면 42,350평이었는데, 뜰 전체의 크기가 7만 5천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고 이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 전체 시가지 크기의 9분의 1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헤롯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성전을 최고의 재료로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규모와 화려함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성전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성전은 잎만 무성했습니다. 이미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려 아무리 기다려도 거기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던 것은 바로 그렇게 입만 무성하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무화과 나무 같은 성전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고, 그 말씀을 결국 그 다음날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해서 기대하셨던 열매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성전은 주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 집”으로 계획되었고 또 세워진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얻으려고 하나님께서 심으신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껏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보시기를 원하셨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죽음을 선고하신 것입니다. 만약 성전이 겉 모습만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잎만 무성한 그런 보기만 좋은 나무가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된다면 그 성전을 통해서 또 다시 정말 어마어마한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주님은 이 산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앞에 ‘진실로’라는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진실로’라는 말씀은 이것이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성취를 보장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때, 그 때 일어나게 될 일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 보기를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아니 만민의 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그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보시기를 원하는 또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응답이라는 엄청난 열매가 맺혀지려면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야기에 답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고, 산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이라고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제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알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 제사를 통해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제물은 바로 ‘백성들의 믿음’, 하나님을 향한 ‘의심치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히브리서의 구절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믿음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나 마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런 기도는 능력 있게 응답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심치 않고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움직이시고 땅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믿음을 잘 챙겨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챙겨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런 믿음에서 맺혀지는 열매가 되어질 때, 그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맺혀져야 할 두 번째 열매는 관계의 회복이라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와 화해하고 싶으셔도 우리에게 처리되지 않은 죄가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와 화해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으로 가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죄가 용서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죄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진심으로 뉘우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것 만으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여기서 주님은 ‘기도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와서 기도할 때, 그 때 기도하는 일보다 앞서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혐의가 있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해서 찾아보왔더니 ‘네 마음 속에 누군가를 향한 반감이나 거리낌이 있거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불편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또 하나의 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전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용서하시는 달고 시원한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성전에서 그런 열매들을 하나도 발견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일을 통해서 성전을 향해서 사망선고를 내리셨고, 그 말씀대로 그 성전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시간 차이는 있지만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경에 주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뿌리까지 말라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은 없습니다. 사실 성전이 있을 필요가 없죠. 이미 지성소의 휘장을 주님께서 찢어주셨고, 그렇게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까요. 그렇지만 건물인 성전이 없어졌다고 해서 성전이 아얘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성전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그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과 용서라는 열매는 이제 교회에서 맺혀져야만 하는 열매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배고프십니다. 오늘도 이 땅의 수많은 무화과 나무 사이를 서성이시면서 주님을 배부르게 해 줄 열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광현교회라는 무화과 나무가 과연 우리 주님의 주린 배를 채워줄 열매를 맺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족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성한 이파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파리에 신경 쓰면 안됩니다. 무화과 나무, 꽃없이 열매가 열리는 나무이니 화려한 꽃에도 신경쓰면 안됩니다. 아직 한창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성하게 열려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맺혀진 열매만이 우리 주님을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파리가 아니라 열매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하며, 그 열매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광현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하며, 나 자신을 그렇게 기도하는 만민 중의 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면, 그렇게 우리 주님을 배부르게 해 드린다면 우리를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이 산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명령해도 그 대로 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저는 분명히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장하신 약속이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권면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기도의 자리를 채워 주십시오. 우리 교회를 모이면 기도하는 그런 교회로 만들어 봅시다. 특히 금요기도회에 많이 나오십시오. 나와서 함께 믿음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물론 여러분의 마음에 맞지 않는 여러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쉽게 나오시지 못할 만한 사정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여러분 자신을 위해, 이 나라와 교회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일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열매이니까요. 다른 건 다 약해져도 교회의 공기도회가 약해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은혜의 통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힘드신 줄 알지만 다시 한번 여러분의 헌신을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 우리 교회가 모일 때마다 용서와 화해의 열매를 맺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가 서로 용서하고, 가족이 서로를 용서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용서하게 되는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와 우리들, 우리와 가족들, 그리고 우리와 주님의 사이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그런 복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열매로 주님의 주린 배를 가득 채워 드리며, 또 주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배고파 하십니다. 오늘도 교회라는 무화과 나무들 사이를 다니시면서 열매를 구하십니다. 주님이 언제 열매를 원하시든지 교회는 주님께 합당한 열매를 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또 용서하게 되어질 때, 주님은 우리에게서 달고 시원한 열매를 따실 것이고, 그런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에게 더욱 풍성한 열매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함께 믿음으로 기도하며, 또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함으로써 우리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 가며 놀라운 기도응답의 복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