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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2.12. 새벽예배 - 너의 저주는 내게 돌리리니(창세기 97)


창2711to23 - 너의 저주는 내게 돌리리니(창9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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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7장 11-23절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이란 하나의 교회입니다. 가장 작은 단위의 언약 공동체입니다. 자녀가 믿는 가정에 태어나면 그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물론 이것이 곧 자동적으로 100퍼센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며,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백성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 같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정의 리더로서의 부모들의 책임과 역할이 중요해 집니다. 적어도 리더에게는 그 공동체의 일원들을 그 공동체에 맞는 인물로 키워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으니까요.


저는 이런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들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만큼 저를 참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 분들이 때로는 신앙교육을 학교교육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게 하고 또 기도하게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신앙교육의 전부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형식만 갖추면 신앙 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은 그것이 신앙교육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신앙적인 틀만 갖추는 방법을 알려주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진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교육을 하려면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신앙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과연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저런 종교적인 훈련으로 아이들을 괴롭힐 필요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철이 들면서 그 가치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 부모가 걸어갔던 아름다운 길을 따라오려고 스스로 애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보여주는 것은 아이들의 머리나 습관이 아니라 존재와 마음 속에 말씀과 신앙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에게 와서 아버지를 속여 이삭대신 축복을 받으라고 꼬드깁니다. 야곱은 그 일이 얼마나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과 자신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이삭이 쉽게 알아차릴 것이고 그러면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게 될 가능성이 컸으니까요. 그래서 그 일의 어려움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리브가는 막무가내 였습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저주든 뭐든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완전히 일그러진 자녀사랑의 일면입니다. 자녀에게 무엇이 정말 유익한 것인지를 생각지 못하는 맹목적인 사랑의 단면입니다. 장자의 복을 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록 정당하고 바른 방법으로 받아야 합니다. 바른 방법으로 받을 수 없다면 포기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그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습니다. 


리브가는 염소 새끼의 고기로는 이삭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그 염소 가죽은 야곱의 팔뚝에 감아서 만져보아도 하자가 없게 만듭니다. 또 에서의 옷을 입혀서 체취도 위장합니다. 그렇게 한 후, 야곱의 손에 요리를 들려 이삭에게로 들여보냅니다. 여러분 이게 가족의 모습입니까? 이것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닐 뿐더러 정말 기본적인 인간성 마저도 사라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일수록 그것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기 쉽다는 교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삭은 자신을 부르는 야곱의 목소리를 듣고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에서같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야곱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야곱은 요리해 온 것을 내밀며 빨리 축복해 달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목소리 보다도 더 수상한 일이었습니다. 사냥하러 나가자 마자 요리를 만들어 들고 들어온 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삭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짐승을 잡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까지 들먹이면서 끝까지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을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오게 해서 손을 만져 보았습니다. 털이 수북했습니다. 이삭은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니 참 이상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어서 이제 야곱에게 축복을 해 주기로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일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또 주기 위해서, 또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저마다 애를 쓰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럴 뿐입니다. 오늘은 특히 이 일과 관련해서 리브가와 야곱 두 사람만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행해야 할  참된 신앙교육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녀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늦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이제까지 믿는 부모로서 바람직한 믿음의 선생과 선배역할을 제대로 해 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때로는 단 한 번의 바람직한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야곱이 이삭을 속이는 일의 위험성을 리브가에게 말했을 때, 리브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리브가도 저주가 무서운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일로 저주를 하실지라도 그 저주는 자신이 감당할 테니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리브가는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 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도 굉장히 무서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리브가는 전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의 방향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저주의 방향 또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의 주저는 내게로 돌리리니…’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의지를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모에게서 자녀가 신앙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과연 이런 부모가 입으로 신앙을 말하고 또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자녀가 그 이야기를 진정성을 가지고 들을까요? 


이러한 리브가의 영향은 야곱의 질문에 대한 야곱의 대답 속에서 그대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짐승을 잡았느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신앙적인 이야기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가 그저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척 했던 것에 한 술 더 떠서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거짓말을 더 완벽한 거짓말이 되게 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야곱은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때까지 야곱은 하나님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믿고 있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전혀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탓일까요? 두 사람의 탓이 큽니다. 부모로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게 해 주어야 했는데 그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랄지방과 브엘세바를 오가면서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여호와의 이름까지 불렀던 이삭과 리브가가 자신들의 인생 마지막을 이런 식으로 장식하고 있으며 또 그 자녀들에게 신앙인으로서 전혀 본이 되지 못했는지 우리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성경은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이들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우리의 삶과 신앙을 하나로 묶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유지해 간다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며,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었을 때, 적어도 그 일의 악한 영향의 일부는 싫든 좋든 우리 자녀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로서 우리에게 맡기신 숙제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보고 또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 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을 영광스럽게 하고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속에 자녀들에게 “나의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임을 보여주고 배우게 해 줄 수 있는 영적인 리더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