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2.15. 주일오전 -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마가복음 55)


막1127to1212 -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마가55).pdf


20131215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1장 27-12장 12절


한 사람이 아주 아주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집이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있는 동안 그 집은 비록 관리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지만 앞마당이 너무나 더럽혀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주인이 제일 싫어하는 것들로 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여독이 풀리지 않았지만  손수 빗자루를 들고 그 지저분한 것들을 다 치웠습니다. 모처럼 상쾌한 기분이 된 주인은 말끔히 치워진 앞마당을 예전 여행을 떠나기 전의 마음이 되어서 기분 좋게 어슬렁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집을 관리하던 관리인들이 굳은 얼굴을 해 가지고는 이 사람에게로 다가 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무슨 권한으로 이렇게 우리 집 마당을 마음대로 치우고 또 이렇게 자기 마당처럼 어슬렁 거립니까?” 만약 성도 여러분이 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겠습니까? 관리인이라는 사람들이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주인 앞에서 권리주장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되었을지라도 관리인들은 주인이 싫어하는 것들을 자기들 대신 청소해 준 사람에게는 “아이고, 뉘 댁 분인지는 모르지만 저희들이 치워야 할 것을 이렇게 대신 치워주시니 참 감사합니다.”하고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오히려 정색을 하고 따지고 들다니 조금은 이상한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관리인들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 그러니까 그 집 주인이 손수 치운 것들이 주인은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지만 관리인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 꼭 지키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신 후에 다시 성전으로 되돌아 오신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일과 똑같았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거니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마치 밀렸던 설거지를 다 끝낸 주부처럼 시원하고 상쾌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런 상쾌한 기분은 예수님을 찾아온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 때문에 일순간에 망쳐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모든 권한을 가진 성전의 관리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들이 자신들에게 이야기 하지도 않고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은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따져 물을 권리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성전을 더럽혔던 사람들,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정확하게 표현하면 ‘돈’때문이었습니다. 그 장사꾼들로 부터 자신들에게 상납되어지는 엄청난 돈 때문에 그들은 성전이 그렇게 더럽혀 지는 것을 그냥 묵인했습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그들과 공범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의 관리자들은 성전이 그런 것들과 그런 행동들로 더럽혀지면 안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처음 했던 말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 하면 “니가 무슨 권리로 이렇게 했니?”라고 따졌던 것입니다. 


“니가 무슨 권리로 이렇게 했니?” 우리는 사람들이 이 말을 주로 언제 사용하는지 잘 압니다. 이 말은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한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너무나 명백하게 옳은 일이기 때문에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을 때, 상대방의 기를 죽이고 입을 막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는 예수님의 행동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 동안 자신들이 저질러 온 일들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들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은 박힌 돌이었던 반면에 예수님은 굴러온 돌이었고, 또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을 향해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기들 손에 쥐어져야 할 돈까지 빼앗길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는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없다고 생각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몰아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위’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유일한 성전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니가 무슨 권리로 니 맘대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추궁했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가 본전이라도 챙기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 한 것은 물론이고 번번히 창피만 당하고 오히려 입장만 더 곤란해 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런 어리석은 노력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권위’라는 말로 억누르면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은 그런 질문을 하면서 아마도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그렇게 했다’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함부로 하나님을 사칭했다고 몰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계획은 여지없이 깨져 버리고 그들이 이제까지 당했던 것 중에서 가장 큰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그 사람 괜히 나섰다가 밑천 다 드러냈다’는 말을 하는데 이들이 꼭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에 오히려 한 가지 질문을 하시면서 “대답해 보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 것은 바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단순한 것 같아도 적어도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는 대답하기가 가장 까다롭고 곤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들도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질문 자체만 보면 너무나 단순해서 의논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A냐 아니면 B냐 물었으니, A인지 B인지 평소의 생각을 말하면 됩니다. 둘 중의 뭐가 맞는지 그것만 이야기 하면 그만 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스라엘의 선생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뭐가 진리인지 혹은 뭐가 진리가 아닌지를 분별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한 권위를 가진 자들로서 뭐가 진리인지만 말해주면 됩니다. 굳이 정답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 것이고 그래서 그들 또한 자기들의 생각만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과연 진리에 대한 권위자나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 다운 모습입니까? 본문에 백성들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때 성전 안에는 많은 백성들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제사장 무리들은 그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의 간단한 질문, 어떻게 보면 백성들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못해서 서로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권위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어린 아이가 부모와 함께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아빠, 저 질문이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야?”하고 물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답을 찾기 위해서 의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답이 있었습니다. 둘 중의 무엇이든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결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한다면 예수는 그러면 왜 너희는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추궁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반대로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대답하면 요한을 진짜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상황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진퇴양란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청문회를 시청할 때마다 많이 듣던 대답니다. “우리는 모른다.” 성도 여러분, 조금 떨어져서 이 일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 대답을 들었다면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이 삼척동자도 이렇다 저렇다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전문가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는 달인들이라고 자처했던 양반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심각하게 끙끙 대더니 그런 다음에 대답이라고 내놓은 대답이 “잘 모르겠는데요.”입니다. 그 대답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웃겼겠습니까? 이 일로 사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며 의지했던 그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대답을 하지 못했으니 예수님께서도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는 그런 일을 하셨는지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그러는 중에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완전히 자기들의 밑천을 다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권위에 의지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참된 권위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권위에 의지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면 훨씬 더 쉽게 풀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권위가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권위를 가진 사람을 따라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권위에 의존하는 것은 굉장히 깨지기 쉽습니다. 그 권위를 가지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만나거나 혹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듣다가 질문 하나라도 하면 당장 화를 내면서 힘으로 억누르려 듭니다. 억누를 수 있을까요? 네. 억누를 수는 있습니다. 힘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러는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깨뜨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권위에 진심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됩니다. 위임받은 권위는 권위를 위한 출발점은 될 수 있어도, 그것 자체가 권위를 참된 권위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권위는 그 권위를 내세운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에 맞는 인격과 실력, 그리고 태도를 갖출 때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권위이건, 부모로서의 권위이건, 정치적인 권위이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순한 원리를 지키지 못해서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권위 때문에 자신을 우습게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연이어 비유를 하나 들려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어떤 현실을 이야기로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하나의 수수께끼이기도 합니다. 그 비유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보석같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 되어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꽁꽁 닫혀있어서 열리지 않는 보석상자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덧붙여 주신 이 비유는 실은 대제사장 무리들의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알아듣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뜬금없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비유이고, 또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비유이기 때문에 요점만 간단히 살피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비유에 나오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포도원은요? 당연히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작농들은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포도원에 대해서 굳이 그 주인이 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다고 설명해 주셨는데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작농들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또 “때가 이르매…”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 때나 열매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소출 전부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소출 얼마’를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작농들이 자기들 몫으로 충분한 것을 받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포도원 주인은 소출 얼마를 요구하려고 종들을 세 번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때리고 모욕을 주고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에게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면 그래도 존중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을 보냈습니다. 사실 현실 속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만약 일이 그 정도가 되면 당장 가서 징벌을 하죠.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끝까지 인내하셨고, 또 그들에게서 끝까지 기대와 소망을 완전히 거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둘째로 이것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의 권우리 이런 일을 한다’는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성전을 더럽히는 일들을 자행해 왔고 나아가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될 것인지 그 숨겨진 동기에 대한 폭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답은 자명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생각대로 포도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돌아올 것입니다. 돌아와서 소작농들은 모두 징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은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결국 소작농들은 자기들의 계획대로 포도원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들 몫으로 충분하게 주어진 수확도 가지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되지만 포도밭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입니다. 그 포도밭은 더 신실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수확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그냥 허무하게 죽고 마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은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쓸 데 없는 돌처럼 그냥 되는 대로 버려진 것같은 예수님은 결국 하늘나라의 초석이 되셨습니다. 모든 참된 성도들로 이루어진 성전인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결론적으로 누구만 손해입니까? 처음에 포도밭을 맡은 농부들입니다. 


저는 목회자가 된 후에 요즘처럼 스스로가 목회자인 것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목회자로서 여기 여러분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도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상식 밖의 행동으로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고, 교회가 자기 것인 줄 알고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엉망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세상이 알고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니 그들과 같은 목사로서 얼굴을 들기 힘든 마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적어도 교회를 향한 큰 근심은 덜을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오히려 교회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현저합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포도밭은 그대로 일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전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더 신실한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돌봄을 받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셔서 참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에 관심과 애정이 있으시다면, 아마도 그만큼 여러분의 실망도 크실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 다녀서 뭣하나, 예수 믿어서 뭣하나 하는 생각이 드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이 땅의 교회, 주님의 교회에 대한 소망을 거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 신앙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원래부터 소망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악한 소작농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세워질 것이며,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이 흔들림 없는 진리에 소망과 믿음을 두고 끝까지 신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튼실한 포도열매로 잘 익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저와 같은 교회의 사역자들과 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제가 심각하고 겸손하게 듣고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잊어서는 안되는 신앙과 삶의 원리가 담고 있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과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삶이 되지 못하게 하며 또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맡은 것을 맡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또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의 성도들이 서로 싸우며 상처를 주고 받았고 또 교회를 깨뜨렸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게서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보내신 목회자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게 맞다고 합니다. 너희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다고 말합니다.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 너희에게 주어진 너희 것이지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것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 나에게 맡겨진 것에 불과합니다. 내 몸, 나의 집, 나의 자녀, 내 학벌, 내 재산, 내 지위, 내 권위, 내 권리, 내 직장, 내 사업, 내 나라, 내 명예…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앞에는 ‘나의…’라는 수식어가 붙여질 수 있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나에게 맡겨진…’이라는 뜻입니다. 여전히 최종적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나는 그저 일시적으로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의…’라는 말을 쓸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땀흘리고 힘든 것 참아가며 한 달 동안 일합니다. 그리고는 월급이라는 것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것을 십일조라고 부르죠. 그런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얻은 것의 10분의 1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까? 나머지 10분의 9는 나의 것이구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원래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래서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물증입니다. 그 10분의 1을 드리면서 그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10분의 9는 우리가 관리하고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안에는 성도로 살아가는 삶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 우리는 나는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자이며 관리하면서 관리자의 유익을 누리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관리만 하면 내 삶이 궁핍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건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요구한 것은 소출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저 ‘소출의 얼마’입니다. 정말 은혜롭게도 포도원 주인은 그 얼마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작농들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과연 소작농들은 그것으로 부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으로 자처하지 않고 그저 관리자로만 남는다고 하여도, 그 관리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들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은혜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맡은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포도밭은 기름진 포도밭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비유로 부터 배워야 할 아주 중요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코 내가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유순자 권사님 시계를 제 주머니에 넣는다고 그게 제 것이 됩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왜 제 것이 안되죠? 유 권사님이 그 시계의 소유권을 저에게 넘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대한 최종 소유권은 끝까지 내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지나치게 우리의 것으로 삼으려는 것들이 결국에는 우리 삶에 무언가 상처를 내고 부작용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만드시고 울타리를 둘러 주시고, 망대를 세워주시고 즙을 짤 틀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기에 부족한 환경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포도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주신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의 삶과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의 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관리자의 풍성함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포도원과 그 속에 있는 모든 포도나무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결코 완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저 관리자로 남으십시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관리자로 사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의 삶이 풍성한가 궁핍한가 한 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코 궁핍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보다 훨씬 풍성할 것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의 관리자의 자리에서 관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서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겸손함 속에 살아가면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참 성도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모든 것 잘 관리하고 하나님 영광 위해서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내 것이 아닌 것, 나에게 맡겨지지 않은 것에 탐내고 욕심내지 않도록. 또 맡겨진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