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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2.22. 주일오전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가복음 56)


막1214to17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가5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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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2장 13-17절



요즘 우리나라는 정치적인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시끄럽지만 그 정치를 둘러싼 종교인들의 반응 때문에 더 혼란스럽고 시끄럽습니다. 다른 종교라면 모르겠는데 똑같은 개신교에 속해있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조차도 정치에 대한 입장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쪽에서는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데 또 한 쪽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여기에다가 어떤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단들에 속한 교회에서는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말하든지 아니면 보수적인 성향의 정당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또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교단들에 속한 교회에서는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적인 차이도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동서와 또 남북이 다른 주장을 합니다. 우리가 사는 대구는 정치적으로 거의 동일한 색깔이어서 그런 혼란이 우리 피부에 많이 와닿지 않지만 사실 이 땅에는 이런 문제 때문에 혼란을 겪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우리가 속해 있는 개혁주의 쪽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사상가이고 또 작가입니다. 이 분이 ‘소명’이라는 아주 의미 있고 또 영향력 있는 책을 한 권 썼는데, 거기서 그는 크리스챤은 정치적으로 볼 때 항상 회색이 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인 즉, 현실 속에서는 진보든 보수든 어느 한쪽이 완전히 옳거나 틀릴 수는 없기 때문에 성도들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 편을 들어서는 안되며,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적인 색깔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릇된 것은 그릇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는 항상 두 가지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내 취향과 이익을 내려놓고 성경을 근거로 해서 어떤 정당이나 정책을 평가내릴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그 분별력이 주는 판단에 따라서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항상 주님 편에 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으로 보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성도는 때로는 그런 취급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면 무조건 어느 한 쪽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 쪽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니라 특정 정당이나 사람에게 속해서 거기 휘둘리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성도들에게도 당연한 권리는 아닙니다. 성도는 그 어디에 속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니까요. 


또 한 가지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요즘이야 정교분리라는 말이 적어도 보수적인 교회들 속에서는 진리처럼 주장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런 주장이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18세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주장되었을 뿐입니다. 그 이전에 유럽 사회는 거의 완전히 개신교 사회였습니다. 형식적으로든 아니든 간에 모든 정치가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 정치가들 중에서는 신실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대통령도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아브라함 링컨처럼 노예해방의 대업을 이루어 냈던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정치가도 아주 확고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가 50년이 넘는 세월을 온갖 수모와 모함을 견디면서 끝내 노예해방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내고 당시 네덜란드를 굉장히 훌륭하고 바른 나라로 세웠던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분도 원래는 목사였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머물렀던 제네바라는 도시는 도시 전체가 교회였습니다. 모든 정치와 생활이 칼빈과 칼빈을 중심으로 한 장로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교회와 정치는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미합중국을 건립했던 사람들의 대다수도 좋은 신앙인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만약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말을 성도들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며, 정치적인 힘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는 정치와 종교, 신앙과 정치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정치와 종교를 서로 다른 영역으로 완전히 나눠 놓고 그러니까 종교는 정치가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해서는 안되고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인간의 삶이 정치와 분리되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가지 않는 한, 인간은 정치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 산 속에 들어가서 개 한 마리를 키워도 그 개와 우리 사이에는 정치적인 관계가 생겨납니다. 가족 속에도 정치는 있고요. 친구지간에도 있습니다. 관계가 있는 곳이면 그게 어디든 정치는 자동으로 생겨납니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이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정치는 인간의 모든 삶과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어떻습니까? 신앙은 과연 삶과 떨어질 수 있을까요? 삶과 상관없는 신앙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도 삶과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 삶이 정치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둘째, 삶이 신앙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정치와 신앙은 최소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떼어 놓으려고 한다면 결국에는 신앙에까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삶이 없는,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한 그런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또다시 괴롭힘을 당하십니다.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완패를 당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이번에는 헤롯당과 결탁했습니다. 헤롯당은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쪽에 붙어서서 정치활동을 했던 친로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왕으로 인정받으며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가고 있고 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님은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의 제안을 받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함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원래 한 배를 탈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도, 또 종교적인 입장도 정반대인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로마의 지배 하에서 제일 크게 자존심이 상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인데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헤롯당은 친로마적인 사람들이어서 어떻게든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강구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들이 함께 예수님께 들고 온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더욱 더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첨예한 문제였습니다. 헤롯당은 당연히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절대로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그 날은 함께 사이좋게 한 배를 타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악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입장에 따라서만 움직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사실 이 질문이 굉장히 예민한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진퇴양란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그런 질문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질문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들고 왔던 것입니다. 만약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신다면 로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 바치라고 하시면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의 지지를 모두 잃어버릴 판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해 놓고 속으로는 “당황하셨어요?”라고 빙긋이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이것이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입장이 곤란해 지는 것같은 것을 두려워하시는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비록 그것이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사탕발림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하면서 했던 말들 속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아주 정확한 평가입니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는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그 누구의 의견에도 휘둘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진리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뜻만을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이 과연 그런 질문 하나 때문에 당황하셨을까요? 난처해 지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도 그런 난처함을 피하기 위한 애매한 답변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부분적인 진리가 아니라 완전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한 진리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일부분에서만 통하는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상황, 그리고 모든 일들을 커버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그 능력과 올바름이 증명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그 누구의 의견에도 휘둘리지 않는 분이시고 또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께서 어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가 다 완전히 적용할 수 있는 진리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우리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맞는 이야기, 여기는 적용할 수 있지만 저기는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그래서 여기는 적용하지만 저기는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실제 생활이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진리로 생각하고 그래서 그 쪽에서는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순종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위에 세워진 무너지지 않는 집이 될 것이고, 또 그 진리가 맺게 하는 열매들로 풍성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우리의 신앙이 현실에서도 충분히 통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대답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사람들은 데나리온, 그러니까 로마의 동전 하나를 꺼내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동전을 받아 든 예수님께서는 그 동전을 이렇게 드시더니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동전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은전인데요 한 사람의 하루 품삯 정도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또 가장 흔히 쓰이는 동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데나리온은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디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것이고 또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앞면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디베리우스 케사르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아우구스트” 그리고 그 뒷면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감람나무 이파리를 손에 든 여인의 모습이 있는데 거기에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황제를 섬기는 여자 제사장이거나 아니면 디베리우스 황제의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동전의 앞면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과 함께 결국 황제가 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제사장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니 이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휴대용 우상이었던 셈입니다. 그 동전 하나에 그렇게 경제와 종교, 그리고 정치가 모두 다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동전을 손에 들고서 “이 형상이 누구의 형상이며 이 글이 누구의 글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뭘 그런 것을 다 묻느냐는 식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굉장히 단순하고 분명한 듯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사실 굉장히 오해 되기 쉬운 말씀입니다. 제가 앞에서 정교분리, 그러니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렸는데요. 실제로 이 구절은 그들이 단골로 사용하면서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세상 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돼. 주님도 세상은 가이사에게 맡기라고 하셨잖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든 그건 그저 정치가들에게 맡기면 돼.”하고 말입니다. 또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입장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나라에는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께는 헌금을 바치라”라는 아주 단순한 주장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을 놓고 보면 충분히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지금 그렇게 단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더 크고 중요한 원리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대답 대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대답을 질문한 사람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두 가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전에 새겨져 있는 형상과 글의 소속이 어디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이란 결국 황제들의 이름이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형상과 이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푸는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대답은 옳았습니다. 그 형상도 이름도 모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래서 데나리온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이어지는 주님의 대답은 이런 뜻이 됩니다. “그렇지? 그러면 그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런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성도 여러분,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의 이름이 새겨진 데나리온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가이사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진 것이 가이사의 것이니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에는 무엇이 포함될까요? 하나씩 보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 그러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의 인장이 찍혀  있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제 두 가지를 합쳐볼까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이 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충성을 바쳐야 할 단 하나의 대상은 결국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나눠져 있었고, 그 질문을 예수님께로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종교, 정치와 신앙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심지어는 로마의 황제까지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은 결국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 선배 중 하나는 20대때에는 굉장히 신앙이 뜨거웠으면서도 또 너무나 자기 영역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하루는 지금은 작고하신 예수원을 세우신 성공회 대천덕 신부님과의 대담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선배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나의 어디까지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기회를 얻어서 어렵게 그 질문을 꺼냈습니다. “신부님, 도대체 저의 얼마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까?” 그랬더니 아주 짧고 분명하지만 그 선배에게는 굉장히 고민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답니다. 죄송합니다만, 표현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하겠습니다. “All of you. Next.” “당신의 전부입니다. 다음 질문요?” 한 것이죠. 그 선배에게는 그렇게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가 그 분께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자명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꾸 나누려고 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영역을 나누고 소속을 나눕니다. 내 것이 어디까지이고 어디서부터는 하나님의 것인지, 어디까지는 세속적인 영역이고 어디서 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그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꼭 인정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나눠지지 않고 통째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공적인 생활도 포함되고 사적인 생활도 포함됩니다. 청치도 포함되어 있고 경제도 포함됩니다. 공부도 포함되고 직업과 직장도 포함되며 우리의 성공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우리 모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의 인장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이사, 그러니까 세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영역 중에서 나에게 속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은 절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부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부분이 되고 맙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치를 잃어버렸고, 과학을 잃어버렸습니다. 시민운동도 원래는 교회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교육도 그랬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속한 하나로 보지 않고서 조각 조각 나누고서 거룩한 것만 우리의 영역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프라이버시’라고 부르는 개인의 사생활 또한 그런 잃어버린 부분이 되어 하나님과 상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과 세상을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이 형상과 이 이름이 누구의 것이냐? 내 형상이 새겨진 너 자신과 내 이름이 새겨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누구의 것이냐?”하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 자신의 대답이 예수님의 생각과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 우리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 또한 조각 조각 나눠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까지는 내 것 여기서 부터는 하나님 것, 교회는 하나님 것 정치는 세상의 것…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되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편을 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할 수 없고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나 자신은 물론이고 온 세상의 모든 부분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나의 모든 의견과 판단까지도 주인되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틀만 지나면 성탄절이 됩니다. 우리를 가장 행복하고 따뜻하게 하는 은혜로운 절기죠? 그런데, 이 성탄절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 영혼의 구원자로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이 세상과 온 우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조각 조각 나뉘어져 사탄에게 빼앗긴 이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 온전히 다스리시기 위해서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혹시 나의 삶과 사고방식 속에는 조각 조각 나뉘어져 세상과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린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 부분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온전한 하나님의 것이 되고, 또 우리 왕의 온전한 다스리심 가운데 거하게 되는 참되고 복된 회복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