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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12.27.금요기도회 -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사도행전 44)



행0809to24 -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사도행전4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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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8장 09-24절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박해로 성도들을 여기 저리로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패배나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고, 거기서도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고쳐지는 것과 같은 정말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보다 더 놀라운 일들을 행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일이 사마리아 성에서도 또다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때 일어난 가장 놀라운 일은 빌립이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 사마리아 성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이 당시 마술은 요즘 텔레비젼에 나오는 마술처럼 손 장난이나 눈속임이 아닙니다. 진짜로 악한 영에 사로 잡혀서 절대로 자연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행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진짜로 기이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그 곳의 터줏대감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며 그를 추앙했습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르며 시몬에 대해서 “이 사람은 정말 위대하다.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다”라고 말할 정도였고, 시몬도 자기 스스로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토를 달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시몬은 유심히 빌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서 빌립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어보니 자기가 행한 것들과는 급이 다른 놀라운 일을 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고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아얘 작정을 하고서 빌립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그를 더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는 믿지 못할 기적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이미 복음을 믿고 세례까지 받았는데 이들이 사마리아로 간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충만하게 임하게 하는 역할은 사도들에게만 맡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직접 복음을 전했을 때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일과 성령충만을 받는 일은 동시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때는 믿고 세례를 받더라도 성령충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교회가 막 세워진 상태에서 진짜 성령충만함과 가짜 성령충만함을 구분짓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을 충만하게 임하시게 하기 위해서 그 곳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미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 그 어려운 상황에 굳이 거기까지 와서 기도하고 또 성령충만함을 덧입게 해 주었던 일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서 성령충만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령충만함을 덧입는 것은 절대로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수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함이 없이 신앙생활하는 것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갓 태어난 영적인 아기로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담대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으로 충만해져야 그 능력을 힘입어 성숙하고 능력있는 어른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노라 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이나 못된 성품 하나 변화시키지 못하고 또 여전히 죄를 이길 수 없고 또 자신에게 쉽게 실망하는 이유는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신뢰하며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순종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을 이렇게 맥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함을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복이며, 내가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받아야 하며 그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다운 성도, 승리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온 베드로와 요한이 이미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거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술사인 시몬이 보기에는 너무 너무 충격적이고 또 엄청나게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에게 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해 주소서” 시몬은 성령을 임하시게 하는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물건처럼 생각했고 또 기도를 그 성령님을 가져오는 기술 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오해였습니다. 그의 생각처럼 사도들이 마음대로 성령님을 부렸던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사도들을 통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성령임재의 매개체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들은 성령을 향해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무엇이죠? 그것은 구하는 것입니다. 요청하는 것입니다.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의도를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고 또 빌립이 행하는 일들을 보고서 크게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을 마음을 다해 따라다니기도 했구요. 기록만 보면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라고, 참 신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사람이 정말 믿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합니다. 그는 우선 성령이 임재하게 하는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능력을 소유하면 이전보다 더 큰 대접 받으면서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고 세례까지 받았는데도 여전히 이런 상태로 남아있을 수가 있을까요? 여전히 이런 생각을 품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2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는 시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성경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치고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대개 믿는다고 고백하고, 또 세례를 받으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이 참 믿는 사람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애석하게도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를 구원할만한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이 시몬의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시몬의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의 믿는다는 고백입니까? 그가 세례를 받은 것입니까? 열심히 빌립을 따라다닌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래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그가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했고 여전히 악독이 가득 차 있고 불의에 매여 있는 상태라고 말하며 그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마음의 돌이킴이 없다면 그는 아직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켜 졌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마음이 되었느냐, 계속해서 바른 마음으로 변화되어져 가고 있고, 그 마음 속에서 악한 마음과 불의함이 사라져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성품과 생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다시 빚어져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몬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옛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전혀 변화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과 세례가 그저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고 회개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탁 속에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내리시는 벌을 면제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다음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만으로는 시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는 시몬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회개했을까요?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애석하게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악해 졌습니다. 그는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불리는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두고 두고 신앙적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원흉이 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믿고 세례를 받았을 뿐, 스스로는 성령충만함을 받는 일과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과연 시몬의 문제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면 정말 거듭나지 않고서 교회만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두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바뀌지 않고 가치관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롭고 바른 마음을 가지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질 않습니다. 마음의 악함과 불의를 제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형식과 행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흐릅니다. 목회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수의 목회자들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처럼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바른 마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는 악함을 회개하라는 메세지는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 괜찮다는 이야기, 정말 잘 하고 있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훨씬 듣기 좋고 힘이 됩니다. 저도 교회 안에서 그런 이야기만 말해지고 또 들려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과연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만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처리해야 할 나쁜 것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요?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시몬에게 베드로의 이야기는 굉장히 불쾌하고 또 불편한 이야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시려고 마지막으로 시몬에게 주셨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래요? 그럼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서 그런 좋지 않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가볍게 받아쳤습니다. 그리고는 흘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자신만 망하고 말았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악독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충분히 구원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되려면, 우리의 믿음이 형식적인 수준에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속 사람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에 까지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자신의 행동 자체 보다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피는 일을 귀찮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는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것을 복된 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에게 회개의 메세지, 내 마음에 대한 메세지가 들려올 때, 그런 메세지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진지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은혜 또한 가볍게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함은 죄가 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의 온전치 못함을 회개할 때, 죄를 버리고 떠날 의지가 분명할 때, 그 때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바로 성령충만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참된 회개의 자리에는 언제나 성령충만함이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은혜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도는 가벼움을 가장 크게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가벼워 져도, 가벼운 것을 미덕으로 여겨도 영적으로 가벼워지면 안됩니다. 가벼우면 성령충만의 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덧입지 못하면 결코 죄와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 힘은 언제나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성령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변화된 참으로 거듭난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