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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12.27.새벽예배 - 라헬이 자기가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창세기 105)



창3001to08 - 라헬이 자기가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창105).pdf


20131227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0장 01-08절


어제 말씀드린 대로 야곱의 가정은 결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었습니다. 태생부터 그런 구조를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레아와 라헬의 사이가 너무 좋아서 서로 갈등과 질투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시작부터 레아는 찬밥신세였습니다. 남편은 있으나 그리고 먼저 그 남편의 아내가 되었으나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라헬은 아이를 하나도 낳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레아는 아들을 넷 씩이나 낳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네번째 아들을 낳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비로소 레아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더 이상 남편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레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 마음의 갈증과 상처가 많이 누그러 졌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인 29장 3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들려주는 라헬의 이야기는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이야기의 주어가 다르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레아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반면에 라헬의 이야기는 라헬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라헬의 이야기는 레아의 이야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언니를 시기한 라헬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남편더러 자신에게 아이를 낳게 하라고 요구를 할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콱 죽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자신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빨리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근원을 찾아 거기서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그 근원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라헬은 하나님을 찾아서 해결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라헬에게는 아직 그럴만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저 인간적인 마음, 그것도 질투심에 사로 잡혀서 억지만 남은 그런 마음만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런 라헬을 향해 화를 냅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주시지 않는데 왜 나를 가지고 괴롭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어!”하고 말입니다. 


이 때 라헬은 예전에 믿음이 없던 시절의 사래가 사용했던 방법을 사용합니다. 바로 몸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만 하나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몸종이니 자기 소유이고 그래서 그 몸종이 아들을 낳으면 자기 아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정말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아내가 자기 남편의 아내를 하나 더 만들어 줍니다. 아무튼 라헬의 생각대로 빌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둘 씩이나 낳았습니다. 라헬은 빌하가 낳은 첫번째 아들에게는 ‘판단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셨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들에게는 ‘겨루다/다투다’라는 뜻을 가진 ‘납달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첫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라헬은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언니 레아가 사용했던 ‘여호와’라는 이름과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는 인격적인 호칭이라면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굉장히 형식적인 이름입니다. 그저 ‘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많이 차이가 없습니다. 창세기가 믿음의 인물들이 겪었던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이 단을 쌓고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는데, 창세기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그들에게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의미를 가진 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라헬은 그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로는 관계 맺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하가 두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도 라헬은 그저 자신이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만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레아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이 생기게 하심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후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또한 하나님께서 주도해 가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은혜로 관계를 이끌어 가실 때, 우리는 그 은혜에 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하고, 또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의 깊이나 풍성함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많이 드릴수록, 하나님 생각을 더 많이 하고 또 하나님께 더 순전한 순종을 드릴수록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는 더 돈독해 질 수 밖에 없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시고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면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하나님과 더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하고 그저 하나님 생각도 거의 하지 않는, 하나님과 형식적인 관계만 맺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똑같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그저 형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은혜와 사랑으로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거의 없으니까요. 


레아의 이야기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라헬의 이야기는 라헬 자신으로 시작해서 라헬 자신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서 레아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끝나지만 라헬의 이야기는 교만한 승리의 외침, 그렇지만 사실 굉장히 공허한 외침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둘 중의 하나를 닮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든지 아니면 우리 자신으로 시작해서 우리 자신으로 끝나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깊이있는 관계라면 우리 삶과 일상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은혜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인격성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이 될 때는 아마도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공허하고 교만한 마지막을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그저 하나님으로만 부르는데서 멈춰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 그러니까 천지를 지으시고, 만유를 움직이시는 위대한 분, 그렇지만 나와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한 분으로 생각하는데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엘로힘이 아니라 ‘여호와’라고 불러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결코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게 부를 수 있도록, 그리고 점점 더 깊은 신뢰를 가지고 그렇게 부를 수 있도록 하나님과 의 관계를 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한 번 점검해 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해 달라고, 나의 신앙이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진심을 드리며, 기쁘게 하나님을 따라가는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신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라헬을 닮은 신앙의 모습이 있다면 그 모든 모습들을 라헬을 닮은 모습으로 바뀌어 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