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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1.05.주일오전 -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신년예배)



창3501to07 - 일어나 벧엘로 돌아가자.pdf


20140105SM (#01).mp3.zip





성경본문 : 창세기 35장 1-7절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차창 밖을 내다 보면 때로는 저 앞의 풍경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가 뒤로 물러가는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만치 앞에 있다고 느껴졌던 미래가 어느새 현재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는 어느새 자꾸 자꾸 뒤로 물러가면서 점점 더 먼 과거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제 자리에 있지만 시간이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앞에서 뒤로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런 느낌이 가장 생생하게 다가오는 시기가 바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해라는 과거를 정리하고 새해라는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의지적으로도 그렇게 할 때가 있지만 문득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연말에 제가 그랬습니다. 지난 한 해는 저에게는 정말 정신없이 지나간 한 해였습니다. 담임목회라는 전혀 생소한 세상에 던져 져서 가야 할 곳은 알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도 제대로 모르는 채, 첫 발자국을 내딛었던 한 해였으니까요. 생전 처음 짊어져 보는 무거운 책임감, 거의 하루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하루 하루 해 내야만 했던 일들… 어찌보면 그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냈고, 견디어 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기쁘고 보람되며 행복한 일도 참 많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지난 연말에는 저에게는 과거의 여느 해의 연말과 굉장히 다른 제대로 설명하기 힘든 여러가지 감정이 겹쳐져 다가왔습니다. 그러는 중에 문득 제 마음 속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유진아, 너 아직 너무 복잡하다. 생각이 너무 많다. 내년에는 나를 더 신뢰해라.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나 네 생각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란다.” 물론 하나님을 더 단순하게 신뢰하는 일은 언제나 필요한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지난 해 마지막 주간에 마음 속에 들려온 이 음성은 하나의 숙제로 여겨지기도 했고 또 2014년과 다가오는 많은 해들을 살며 또 사역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열쇠로 삼아야할 원칙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2014년의 저의 개인적인 삶과 사역,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의 저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은 아마도 이러한 주님의 음성에 제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연말을 지내고 또 연시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작은 느낌이나 깨달음이 있거든 그것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고 꼭 붙들고서 일년을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느낌과 깨달음이 일년 동안의 여러분의 화두가 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형이 받을 복까지 가로 챈 후, 형을 피해서 밧단아람으로 도망쳤던 야곱은 너무나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형은 그렇게 돌아온 동생을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야곱은 여전히 형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형을 따라서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또 머리를 썼습니다. 몸이 약한 어미 양들과 새끼 양들이 너무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여행하는 것이 힘드니 형이 먼저 가면 며칠 후에 따라 가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의 속셈은 그렇게 형을 먼저 보내고 형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살아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차하면 도망칠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이 머물게 된 곳이 숙곳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완전한 평화도 잠시잠깐이었습니다. 야곱의 고명 딸 디나가 하몰의 땅으로 마실을 나갔다가 거기서 봉변을 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오빠들이 하몰 족속을 속여서 그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당시의 배경으로 보면 충분히 그렇게 복수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일이 야곱의 가족이 전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하몰족속만 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야곱의 가족은 사실 작은 땅을 얻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지인, 그것도 그다지 세력이 크지 않은 외지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의 아들들이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속임수를 써서 저질렀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에서에게로 도망치면 될 것 같지만 그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가나안 족속들의 습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아주 컸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그렇게 아무런 대책이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고,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 거해라. 그리고 거기서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던 때에 너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라”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실제로 어느 정도는 성공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삶은 꼬여가기만 했고, 결국에는 절대로 자기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매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정말 열심히 풀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를 풀면 두 개가 얽힙니다. 두 개를 풀면 네 개가 섥힙니다. 야곱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얽혀가기만 하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 야곱의 인생은 자신이 풀어가려고 해서는 안되는 인생이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형하고 엉켜서 싸웠고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 바람에 이름까지 발꿈치라는 뜻의 야곱이 된 사람인데, 어찌 스스로 자기 인생을 풀어갈 수 있겠습니까? 야곱의 인생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푸셔야만 풀리는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않고 자기 손에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은 자기 힘으로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요구하신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자신이 자신의 능력과 머리로 모든 것을 다 챙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챙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죄를 짓고 도망치고 있었을 때,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 나타나셔서 환상까지 보여주시고 앞으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은혜의 하나님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단 한 순간도 야곱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야곱이 밧단아람에 도착하자마자 라헬을 만난 일, 삼촌의 속임수 속에서도 큰 재산을 이룬 일, 삼촌의 추격에서 빠져나왔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보호하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여전히 자신의 삶 속으로 맞아 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런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어려움과 난관들을 풀 수 있는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내가 너를 처음 찾아갔던 그 자리로 돌아가 이전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켰듯이 이제는 네가 나를 온전한 너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그 일이 끝나면 다시 제 자리 돌아가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물론 우리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만큼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우리 마음의 간절함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의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모셔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하나님이 되셨고, 나의 하나님으로 나를 위해서 움직이고 계시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내 인생의 문 밖에 서 계시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불필요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복잡하고 힘든 일들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그래서 당혹스러운 일을 당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바로 그 당혹스러운 일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해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지만 그 모든 해답들 속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해답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이제는 나를 진짜로 너의 하나님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너와 나의 관계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성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느냐, 하나님은 나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분이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있을 때, 그것을 우리 삶에서 가장 먼저 챙기고 또 가장 중요한 기초로 삼을 때, 그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불필요한 어려움과 혼란을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일어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 두려움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 야곱이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또 회복하려면 우리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더 선호합니다. 그 자리가 그렇게 좋거나 편안하지 않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이유는 야곱이 그런 위기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에 익숙해져서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하신 하나님은 또 “벧엘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다가 돌을 베게삼아서 잠이 들었을 때, 야곱을 찾아오셨던 그 곳,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곳, 그래서 어쨌든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그 곳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은 그런 점에서 야곱에게는 커다른 은혜의 자리이기도 했지만 하나님과 야곱의 관계가 시작된 원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지금 네가 앉아 있는 익숙해져 있는 그 자리, 또 계속 네가 있고 싶은 자리를 고집하지 말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다행히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곧바로 가족들과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야곱은 자신이 반드시 벧엘로 돌아가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또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하지만 그러려면 그 이전에 살던 방식 그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야곱은 이방 신상을 제거하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충격입니다. 이 때까지 야곱 집안에 이방 신상이 남아있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시 야곱과 그의 가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여러가지 것들 중에서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항상 돈이나 힘같이 직접적이고 신속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일순위에 놓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것들은 내려놓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나님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또 가족들에게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습관은 정결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잘못되고 온전치 못한 생활 습관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의복을 바꿔야 했습니다. 옷은 요즘도 그렇지만 문화적인 의미가 굉장히 큽니다. 야곱이 집안 사람들에게 옷을 바꿔 입으라고 했던 것은 단순히 더러운 옷을 갈아 입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을 닮은 문화, 그들이 익숙해져 있는 문화를 청산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이니까요. 하나님을 만나고 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맞아 들이려면 의지해서 살아가겠다고 결단해야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온당치 못한 문화까지도 떠나야만 합니다. 야곱은 그래서 자신의 가족과 식솔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문설주에 붙어 있는 부적 하나를 떼는 일에도 겁을 내고 벌벌 떱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과 야곱의 가족들에게 우상을 버리는 일은 어려운 일을 넘어서서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몸에 익숙한 생활습관과 문화를 버리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일제 강점기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머리를 자르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저항했었는지를 기억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어렵고 두려운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야곱이 그것을 강하게 요구했고, 가족들은 그 말에 따랐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자신해서 우상 뿐만 아니라 귀고리까지 다 내놓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장신구들은 휴대용 부적이나 우상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 받아든 야곱은 그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어서 숨겨 버렸습니다. 다시는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거기서 부터 벧엘까지 가는 일은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습격당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야곱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식솔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모험을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렇게 치밀하고 계산적인 야곱에게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이상하리 만치 아무 일 없이, 너무나 평안하게 벧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같은 보호하심 덕분이었습니다. 벧엘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거기까지 오는 길을 완전히 책임져 주셨고, 야곱은 그 덕분에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으며, 원점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제대로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저 벧엘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만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명령 자체만 보면 야곱이 숙곳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그런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요구를 하실 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요구가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어떤 명령 뒤에는 “네가 이 명령에 따르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다 내가 책임져 주겠다”는 약속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능력 밖의 시험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시험에 부딛혀야 한다면 그 때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야곱이 이길 수 있고 또 이겨내야할 시험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벧엘을 향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야곱이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가나안 족속의 공격을 이겨내는 것은 그가 이겨낼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시험은 그렇게 피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올해 표어는 “돌아가자! 회복의 땅, 우리의 벧엘로!”입니다. 한 번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돌아가자! 회복의 땅, 우리의 벧엘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입니다. 이 표어를 둘로 나눠서 적용해 본다면, 아직 벧엘의 경험이 없으신 분들에게는 올해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벧엘이 되어야 하며, 벧엘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그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온전하게 회복하는 그런 한 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든 원점으로 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도 계시지만 이미 꽤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을 해 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우리가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점을 생각하고 그 원점을 되찾는 일, 그리고 때로는 필요하다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우리의 신앙은 계속해서 원점에서 점점 더 멀리 벗어나기만 할 것이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 되어 주시는 일이 가져다 주는 풍성한 유익과 능력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앞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께서 저 마음 속에 들려주신 말씀도 따지고 보면 “원점으로 되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 내가 너에게 준 너의 자리로 되돌아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걸어 놓고서 믿고, 걸어 놓고서 사역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니 분명히 믿음생활도 사역도 하느라고 끙끙대며 하기는 했지만 무언가를 온전히 걸어 놓고서 하듯이 그렇게 하지는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제가 원점으로 되돌아 가려면 걸어 놓고 믿고 걸어 놓고 사역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우상과 장신구들을 모두 나무 밑에 묻어버리고, 또 위험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벧엘로 올라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보면 야곱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신앙생활과 영적인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순종 해야 할 원리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이런 저런 너무나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그러면서도 엉커버린 실타래 같기만 한 것, 그리고 영적으로는 풍성함과 자유 대신에 푸석푸석한 건조함과 무의미함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벧엘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 그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4년 올 한 해가 우리 모두가 벧엘로 돌아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두들 신앙의 원점에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과 인생과 믿음의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너무 복잡하면 안됩니다. 너무 생각이 많아서는 안됩니다. 신앙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누리며 사는 일에 관한 한, 이런 저런 복잡한 내 생각을 좀 내려놓고 충분히 단순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더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걸어 놓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모험을 해 보는 일이 필요하고, 예전에는 하지 않던 일들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향해 출발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위해서 무언가를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걸어 놓고 믿어보시고 걸어 놓고 하나님을 섬겨 보시기 바랍니다. 꼭 한 번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의 야곱처럼 내가 계산 다하고, 내가 결정 다 해서 그것만 따르지 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걸어야 할까요? 우선 여러분이 지금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이건 꼭 이렇게 해야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중에서 한 가지만 걸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사항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서 그것을 걸어 놓고 신앙생활을 해 보십시오. 쉽게 말씀드려서 그 동안 절대로 안 하던 짓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 여러분이 벧엘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물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일은 결코 적당히 믿어서는 제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벧엘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일단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조금 더 단순해지고, 조금 더 담대해집시다. 그리고 무언가 걸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걸고서 벧엘로 올라가 봅시다.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우리의 벧엘을 향해 우리의 첫 발을 내딛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게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단순하게 하여서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하소서.

내가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올해는 ‘걸어놓고’ 신앙생활 하는 한 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책임져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