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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07. 특새 2.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산상수훈 2)

2.마0513to20 -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pdf


20140107D (#01).mp3.zip





설교본문 : 마태복음 5장 13-20절



가짜만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가짜로 만족할 수 있어도 진짜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짜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진짜를 향한 갈증과 배고픔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진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저 아프고 힘들기만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오히려 그 사람을 진짜를 바라보게 하고 또 그 진짜를 찾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를 맛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입니다. 하늘나라를 맛본 사람들은 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즐거움과 만족도 시시하게만 느껴집니다. 우리 주님의 팔복설교에 나오는 복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와 삶의 모습이 진짜로 복된 이유는 그런 것들이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그림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진짜를 향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가난함과 애통함, 겸손함과 주리고 목마름, 그리고 마음의 청결함과 화평을 만들려는 노력과 주님을 위해서 핍박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이들이 진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은 얻지 못하는 법입니다. 원해야 얻을 수 있고, 간절히 원하면 원할수록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들이 복된 마음이며, 이런 모습들이 복된 모습입니다. 하늘의 은혜와 복을 얻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일까요? 하늘 백성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을 소망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그리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이미 소금이며 이미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 속에 하늘 백성의 마음을 담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짠 맛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미 밝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미 소금이며 이미 빛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꾸 자기 힘으로 소금이 되고, 자꾸 자기 힘으로 빛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된 것을 자기 힘으로 또 되려고 하니까 자기가 만족할 만큼의 짠 맛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만족할 만큼의 밝음을 가질 때까지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이 이미 아들인데, 자신의 힘으로 아들의 자격을 얻으려고 하면 결코 아들다운 아들로, 그리고 아들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팔복의 마음들이 담기면 우리는 이미 소금이고 1빛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짠 맛을 잃지 말라고 하셨지 짠 맛을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자신이 빛이라는 것을 숨기지 말라고 하셨지 스스로 밝음을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있는 짠 맛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빛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우리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맛이 없는 세상에 맛을 더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고, 또 어두운 세상에 밝음을 더하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짠맛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밝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착한 행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알맞는 정직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애씀이 세상을 맛이 있는 세상이 되게 하고 밝은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책임지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너희 힘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저 너희의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가족을 변화시키고 직장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어서 실망하신 분이 계십니까? 이제 그 부담에서 벗어 나십시오. 우리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신 짠 맛과 밝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착한 행실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전부이니까요. 그렇게 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낼 것이고 그러면 다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을 때, 로마는 정말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수많은 철학과 사상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저 중동의 한 구석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와 철학들은 전혀 그 당시 로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었던 반면에 복음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성도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정치에 뛰어들고 경제에 뛰어들어서 할 수 있다를 외치면서 동분서주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2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거의 대부분은 사회의 하층민이었습니다. 로마가 보았던 것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과 다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 거룩한 모습, 양심을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짠 맛을 잃지 않고 또 빛 됨을 숨기지 않았더니 그 적은 무리의 평범한 삶이 로마 전체를 굴복시켰던 것입니다. 황제를 숭배하고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그 나라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귀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그래서 누구라도 그 말씀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도 바꾸거나 빼버리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도답게 사는 일의 무게와 중요성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답게 살아가야 할 의무,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율법다운 율법으로 회복시켜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율법에 기쁘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도대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흔히 쓰는 말로 율법 벌레였습니다. 정말 율법을 지키는 일에는 목숨을 걸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는 율법을 지키는 일을 형식적인 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꼭 할꺼야. 그렇지만 이 이상은 절대로 안한다. 요구되는 것은 하지만 자발적인 것은 안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정말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과 헌신은 형식에만 머물고 요구된 것들에만 머물러 있었고, 그나마도 그렇게 지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쌓는 일에만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이들의 수준이나 혹은 이들의 의를 닮아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가 어떻게 하면 이들의 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늘 백성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됩니다. 가난한 심령,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마음, 겸손하고 낮은 마음, 죄인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 나누이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화평을 만들어 내려는 마음과 주님을 위해서는 손해와 오해도 무릅쓰려는 마음 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면 우리의 의는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 그러니까 하늘 백성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여기까지는 꼭 할꺼야. 그렇지만 이 이상은 절대로 안한다”라는 주장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요구되는 것은 하지만 자발적으로는 안한다”라는 말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움직여 가는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항상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 백성의 마음, 그 복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짠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밝음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세상에 공히 가치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우리로 하여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도 여전히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는 길안내자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항상 천국 백성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소금으로 남을 수 있고, 그래야 빛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항상 하늘 백성의 참으로 복된 마음으로 사셔서, 이 땅에서 하늘 복을 누리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천국문으로 넉넉히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