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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1.10. 특새 5.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산상수훈 5)


5.마0601to09&16to18 -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pdf


20140110D (#01).mp3.zip






       설교본문 : 마태복음 6장 1-9절, 16-18절




“거룩한 것이 썩으면 더 심한 악취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 더러워야 할 것이 더러운 것은 별로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닙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반드시 깨끗해야만 하는 것이 더러울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불쾌해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욕을 하며 심지어는 반대를 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한 욕설과 반대 뒤에는 물론 영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너무 심각하게 깨져 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감을 그렇게 표현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꽃향기가 나기를 바랬는데, 그들이 맡은 냄새는 애석하게도 심한 악취였으니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또 희생할 것을 요구하며 거룩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이유이니까요. 저는 그들이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줄 때,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경청해야 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 중에서는 근거없어 보이는 비난들도 있지만 그것들 또한 잘 소화해서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과 영혼을 위한 양약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 기독교의 겉으로 보이는 부정적인 모습을 들어 좋지 않은 소리를 할 때, 절대로 변명하려고 하시거나 부인하지 마시고 맞붙어서 싸우려 들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시고 다 부족하고 아직도 완전하지 않아서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다 틀린 것은 아니고 또 비록 나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기독교회가 그다지 좋은 향기를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이 항상 어느 정도는 거룩함을 더럽힐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 그래서 좋은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바른 동기와 바른 목적을 가지고 하지 않을 때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주로 첫번째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심각한 문제인 것이 분명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번째 경우도 굉장히 심각합니다. 사실 종교를 썩게 하는 것은 주로 두번째 때문이니까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주님은 세 가지의 신앙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를 문제삼으셨던 것은 그 당시 이 세 가지는 유대교가 가장 경건한 행위들로 여기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가지 행동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삼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이 세가지 경건한 행동들을 망가뜨려 놓기는 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이런 행동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들로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만일 이런 행동들을 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구제할 때에, 기도할 때에, 금식할 때에”라는 말로 가르침들을 시작하셨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욕물이 더럽다고 아기까지 버리지는 말라”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신앙은 내용과 형식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형식이 잘못되었다면 그런 형식은 버리고 떠나야 마땅하겠지만 신앙은 바른 형식 속에 바른 내용을 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형식은 바른데 내용이 잘못되어져 있다면 그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형식도 내용도 모두 살려야 합니다. 율법이 망가졌다고 율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속에 바른 정신을 담아서 지켜가야 하며, 경건한 행위가 더럽혀 졌다고 해서 그 행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경건한 행동 속에 진짜 경건을 담아야 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형식만 갖추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주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하든 구제만 하면 되고, 기도만 하면 되고, 또 금식만 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 무엇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신앙을 하나님을 빠져버린 신앙생활이 되게 합니다. 그들은 꼭 구제를 해야 한다고만 했습니다. 그 구제를 어떻게 해야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도울 때,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그리고 크게 알리며 자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선생들은 기도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 또한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일부러 회당이나 큰 사거리의 모퉁이에 서서 큰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금식하는 것을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웃고 떠들고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이 오늘 금식하는 날에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 집니다. 거울을 보고 일부러 머리를 헝크러 뜨립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앞 뒤에 “나 금식중”이라는 팻말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원리 중에 ‘코람 데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라틴어인데요, 저는 이 짧은 말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도로 사는 삶 자체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알려주는 그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을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과 평가가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좋은 평가도 그것이 하나님의 평가와 일치할 때에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가장 심각하게 실패하는 경우가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순전히 사람들의 좋은 평가와 평판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만 생각할 때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과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한 일이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 일은 하나님 앞에서는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해서 좋은 평판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경건한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하면 ‘연극배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경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에게 박수를 받으려고 무대에서 연극하는 배우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은 박수를 쳐 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입니다. 더 이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배우로 만들어서 하는 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짜에만 관심을 가지십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실된 삶을 보는 것을 좋아 하십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슨 선한 일이나 거룩한 일을 하든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니라 정반대로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이기는 하지만 심지어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하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게 선한 일이나 거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진실한 삶의 표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목하여 보시며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은밀하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관심이 없으시니 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하는 모든 일은 우리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 분이 가치있게 여기시는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하는데, 그 방식이 바로 ‘은밀하게’입니다. ‘가능하다면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또 은밀하게 하시다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속이 상해지려고 할 때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는 약속을 떠올리시고 그 약속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금새 사라지는 연기같은 박수가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광스러운 칭찬과 상급에 생각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선하고 거룩한 것들을 향기롭고 아름답게 지키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내 부패하기 시작하고 향기대신 악취를 풍기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것이 하나님께 가치 있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것이 되게 하려면 그것이 은밀하게 행하는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선하고 거룩한 것이 오히려 나를 망가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이런 것들은 하나님만 아시는 은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나의 자랑거리가 될 때, 내 영혼은 병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 백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늘 백성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며, 그래서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쉽지 않지만 하늘 영광을 기대하면서 땅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주는 영광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아시는 것만이 영원합니다. 그 분은 그 분이 아시는 것만 하늘의 것으로 갚아주시고 또 하늘의 것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사셔서 하나님을 영원히 빚지게 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