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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1.19. 주일오전예배 - 전부를 넣었느니라(마가복음 59)

막1235ro44 - 전부를 넣었느니라(마가59).pdf


20140119SM (#2).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2장 35-44절



저하고 함께 한 교회를 섬기던 한 목사님이 세례자 교육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아주 씁쓸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육시간에 성령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답니다. 그랬더니 젊은 남자 청년 하나가 자기가 잘 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러면 한 번 성령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했더니 설명을 하는데, 그 설명이 아주 이상하더랍니다. 이 청년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설명한 것일까요? 이 청년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성령님이 아니라 홍콩 영화배우인 성룡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청년은 그저 그 목사님의 질문을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을 한 것일까요? 알고 보니 그 청년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하나도 들어보지 못했더랍니다. 그러니 성령을 성룡으로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이 나에게 어떤 유익과 도움을 주는가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전혀 몰라도 그저 믿는다고만 말하면 믿을 수 있는 종교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그저 예수만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괜찮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하며, 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니  저도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주일오후 교리공부 시간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도 무척 중요하지만 지난 주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기독론은 정말 우리 신앙의 사활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참석하지 못하셨더라도 이번 주일부터라도 꼭 참석하셔서 함께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에서는 기독론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기독론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문장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다”라는 아주 짧은 문장이 그것입니다. 과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이 문장이 말하는 진리는 전혀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없고, 성령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도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연결고리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진짜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어떤 연결고리인가, 왜 유일한 연결고리일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의 동기나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도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가지는 아름다운 태도가 자녀가 알고 있는 부모가 어떤 부모인가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 별로 신이 나질 않고, 또 예수님을 위해서 기쁘게 헌신하기 힘든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그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런 예수님께 기쁘게 헌신하는 일은 마치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기 부모이기 때문에 무조건 효도해야만 하는 일과 똑같아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모든 사람들의 시도는 모두가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셈이 되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모두 잃어버리고 당황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일들은 예수님께는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최고의 선생임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마지막 질문자였던 한 서기관이 한 역할은 그야말로 결정적이었습니다. 좋은 의도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이 서기관과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말씀 이후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성경은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무슨 무슨 종결자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로 만인이 인정하는 논쟁 종결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지하게 정말 저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앞에 모였던 사람들이 품었던 그런 질문을 아시고 해 주신 예수님 자신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으로 대답을 시작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구약성경이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할 때, 분명히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은 메시야,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또 가르친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란 곧 왕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위대한 정치 지도자라고 믿으며 그런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상식에 속한 문제였기 때문에 군중들 또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그 두 가지 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질문을 하나 더 더하셨습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은 대표적인 메시야 시편으로 불리는 시편 110편의 1절입니다. 그 시편을 있는 그대로 보면 다윗이 환상 중에 메시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너는 내가 너의 원수를 완전히 박살낼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장면을 ‘주께서 내 주께…”라는 말로 전달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메시야도 주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윗은 환상 중에 두 분이 모두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그 광경을 “주께서 내 주께…”라는 말로 시작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는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한 가지 경우 밖에 없습니다. 놀랍게도 메시야는 분명히 다윗의 혈통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실 것이지만, 그는 서기관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대로 단순히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왕은 왕이지만 서기관들이 바라는 그런 왕이 아닌 왕,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온 우주의 왕 으로 오신다는 것이 두번째 질문의 답이 될 것입니다. 서기관들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메시야가 눈 앞에 있는데도 믿기는 커녕 어떻게 하면 몰아낼 수 있을까만 궁리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의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을 가진 메시야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예수님께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정말 그럴만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실망은 자기가 만들어 놓고 정해 놓은 예수님의 모습이 깨어졌기 때문에 느끼는 실망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는 그 예수님의 상이 그저 자기 마음과 소원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의 약속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열심히 믿었는데 복 안 준다고 불평합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했는데 소원 안들어 주셨다고 투덜댑니다. 기도 많이 했는데 기도대로 안 들어 주셨다고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습니다. 다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가지고 있어서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성경이 일차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속량하셔서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만들어 주신 우리의 왕,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님을 마술램프 속에 마술사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그런 복이 아닙니다. 예수 열심히 믿었는데 고난만 올 때, 그 때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복입니다. 신앙생활 잘 했는데도 어려움만 계속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해 주는 복입니다. 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는 그런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하늘에 속한 하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것만 주시지는 않습니다. 필요한 것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위로도 주십니다.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병도 고쳐 주십니다. 다 주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은 이런 복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알아서 챙겨 주실테니까 그저 나만 믿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모르니까 마음대로 정하고 마음대로 기대하다가 혼자 실망하고 삐치는 것입니다. 다 예수님에 대한 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되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야 실망하지 않을 수 있고, 진짜 복을 주실 때 그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짜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르침을 계속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의 주제는 온전치 못한 서기관들을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물론 그 당시에 살았던 모든 서기관들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굉장히 존경과 대접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찾아 다녔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의 긴 옷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표시였습니다. 땅에 끌리는 긴 옷을 입으면 ‘나는 서기관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원래 그 옷은 성전에서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옷을 입고 시장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습니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말이죠.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에게 존경어린 인사를 받기 위해서 였습니다. 제가 목사의 일을 해 보니 목사만큼 위험한 직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존중을 받고 대접을 해 주니까요.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이게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번 두번 그런 것을 받다가 보면 그것을 바라고 찾아다니고요. 그렇게 대접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괘씸한 감정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정말 망가지는 것이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저에게 그 보호장치는 예수님의 짧은 한마디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니 어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느냐?”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인데 스스로 영광을 취하고 누리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때로 전혀 알아주지 않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면 인간인지라 아주 살짝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려고 애씁니다. 그게 저를 지켜주니까요. 


자신의 영광을 찾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서기관들을 주의하라는 것은 그들을 지도자로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들이 사는 방식을 닮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개신교회에 관련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보도기사 밑에 이런 저런 댓글을 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믿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오히려 믿는 사람들의 댓글을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정말 통렬하게 비난합니다. 물론 비난받아야 마땅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저렇게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저 성도의 마음 속에는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그의 삶은 전혀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서기관이나 백성들, 목회자나 혹은 평신도를 막론하고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말라고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기관을 주의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온전치 못한 지도자를 주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방식을 쫓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하셨고 이들이 하나님께 받을 형벌이 더 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다니!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로 당시의 서기관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원래 미망인들은 구약성경이 그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보호해 주어야 할 이웃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미망인들은 당시에는 그저 남편이 남긴 유산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는 일에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요즘 사람들이 변호사에 의지하듯이 율법의 전문가들인 서기관들에게 의지해서 정해주는 대로 유산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위치에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 서기관들이 이들의 사정과 권리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 일을 해결해 주는 댓가로 유산의 상당부분을 착복하기도 했고, 심한 경우에는 전부를 가져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들만의 특별한 모습은 아닙니다. 원래 이것은 권력과 부,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사정과 아픔은 전혀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란 그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게 해 주는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벌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하늘나라의 상은 우리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자들에게 한 것 주님께 한 것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헌금궤가 있는 쪽으로 돌아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헌금 넣는 모습을 지켜보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의 헌금 궤는 동전이나 돈이 들어가는 입구가 입구는 넓고 아래 쪽은 좁은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동전을 넣기 쉽게 하고 도둑맞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겠죠. 그런데, 이런 모양의 입구는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크게 해 주는 확성기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헌금을 넣은 사람이 얼마를 넣었는지 다 공개되는 그런 구조였던 것입니다. 먼저 부자들이 여럿 헌금 궤에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들은 꽤 많은 액수를 넣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미망인 하나가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거 헌금을 넣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헌금으로 넣은 돈은 두 렙돈 그러니까 당시의 하루 품삯의 8분의 1정도가 되는 액수의 동전 두 개였습니다. 아마 부자는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헌금을 냈겠지만 그 미망인은 그 작은 소리만큼이나 부끄러워하면서 헌금을 넣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함께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부자들을 향해서는 선망의 눈초리를 보냈고, 그 미망인을 향해서는 “겨우~!”라는 눈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제가 목회자가 되면서 부터 저희 어머니는 저에게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지원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도 저희도 자식인지라 명절 때나 생신 때가 되면 정말 죄송스럽지만 정말 정말 작은 액수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저희에게 반복해서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주는 건 열 배다. 내가 열 배로 쓸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제가 그 돈을 남에게 주었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은 그저 그 액수의 돈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는 다릅니다. 넉넉치 못한 자식이 어머니에게 주는 것은 절대로 그 액수 그대로의 돈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그게 헌금이든 무엇이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헌신의 질입니다. 물론 할 수 있는데도 인색한 것은 절대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간이든 돈이든 혹은 육체적인 노력이든 없는데, 부족한데 거기서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드리는 작은 것은 하나님께 결코 작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풍족한 중에서 넣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진 생활비의 전부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돈이겠습니까? 이게 액수로 평가할 수 있는 그런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그 여인의 전부였습니다. 그 여인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크기였고 사랑의 크기였습니다. 그것을 아시니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모든 부자들이 넣은 헌금을 다 합한 것보다 그 여인이 넣은 동전 두 닢이 훨씬 더 큰 액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다윗같은 왕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위대한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번쩍이는 황금보좌가 아니라 거칠디 거친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왕이 되셨으며, 그것을 통해 로마가 아닌 사탄의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새 새명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영광을 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의 왕과 온 우주의 왕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하셨던 서기관들의 모습과는 정반대가 되는 모습입니다. 서기관들은 그럴 듯하게 보였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과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자신의 영광, 자신의 생명,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저는 두 렙돈을  헌금한 여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마땅히 이것보다 더 깊고 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그를 밀어 부쳐서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기쁘고 편해지는 그런 상태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잘 압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어 우리를 살게 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섬기는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헌신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며, 하늘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또 갚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이런 모든 것을 다한 헌신에는 우리도 진심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성경이 말하는 그런 우리의 왕으로, 메시야로 믿는다면 우리를 향한 우리 왕의 사랑과 헌신을 안다면 우리 또한 그 과부처럼 주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 하나님께 두 렙돈을 드렸던 그 과부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는 바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이러한 헌신 덕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안다면, 이런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적당하게 예수를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올해는 부족하더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예수님을 향한 진심을 조금이라도 더 더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과부의 손끝에 놓인 두 렙돈이 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의 삶과 신앙이 과부의 두 렙돈처럼 하나님께는 온 천하보다도 귀한 그런 삶과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