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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1.26. 주일오전 - 끝까지 견디는 자는(마가복음 60)



막1301to13 - 끝까지 견디는 자는(마가60).pdf


20140126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3장 01-13절



성도 여러분, ‘종말’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종말이란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서 이 세상의 옛 역사가 끝나고 예수님께서 온전히 왕되시는 나라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종말이란 이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어서 온전한 주님 나라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종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서라도 내가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어야만 하니까요. 어떤 지식이든지 그 지식의 대상이 그 지식의 가치를 결정하듯이 종말이 우리에게 중요한 만큼 이 종말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것 또한 그만큼 커다란 가치를 지닙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과 종말이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과 다음 주일 설교에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 온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한 중요하고 유익한 정보와 교훈을 얻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마치시고 성전에서 나오는데 제자들 중 한 명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 돌들의 크기와 저 건물의 웅장함을 한 번 보십시오. 정말 어마 어마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이 제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에 찬성하면서 성전을 보고 함께 감탄하시기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제자의 성전에 대한 반응은 그 당시의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성전은 흔히 헤롯성전이라고 불리는 성전이었는데요. 여기서 헤롯이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이스라엘의 왕좌에 있었던 헤롯대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왕이기는 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왕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엄청난 크기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헤롯성전은 주전 20년에 착공되어 주후 63년에나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기간만 83년이 걸린 셈입니다. 기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크기도 또한 그랬습니다. 이 성전은 불규칙한 사각형 모양이었는데요. 성전 북쪽 벽이 314m, 남쪽 벽이 280m, 동쪽 벽이 469m 그리고 서쪽 벽이 485m나 되었고, 당시 전체 예루살렘 시가지 전체 크기의 약 6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 성전은 최대한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을 뿐 아니라 거기 사용된 돌의 크기도 어마 어마해서 그 돌의 크기만으로도 사람들의 기가 질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당시 서쪽 벽에 있던 곳에서 돌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돌은 길이가 15미터가 넘고 높이는 2.5미터나 되었고 무게만 해도 거의 600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화려함 또한 남달라서 당시 로마의 영토 안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제자가 그 성전을 보면서 예수님께 저 건물들을 보라고, 그리고 저 돌들을 보라고 감탄했던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성전은 외형적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기도 했으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제자를 돌아보시고는 아주 퉁명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저 건물과 저 돌들을 보고 있구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거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감람산으로 옮기셨고 거기서 헤롯성전을 마주 대하고 앉으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 이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아주 심각하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때 보여질 징조는 무엇입니까?” 


오늘과 다음 주일에 우리가 살펴볼 마가복음 13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13장의 말씀들을 계속해서 살펴보기 전에 확실히 해 놓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13장의 말씀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의 재림, 그러니까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5절부터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이 종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무너지게 될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다음 주일 본문인 14절 이하를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 이 말씀이 종말,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의 때에 대한 말씀이라면 전혀 도망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때는 도적같이 그것도 전 세계, 아니 온 우주가 동시에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산은 커녕 다윗의 말한 것처럼 지옥 밑바닥까지 도망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미리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 말씀을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해서 이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하나 하나의 징조를 찾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마가복음 13장의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들만 본다면 이 말씀들은 종말에 대한 말씀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 말씀들을 글자 그대로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을 배경에 놓고서 말씀하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니까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주일에 계속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적어도 마가복음 13장은 종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일단은 그렇게 보고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 본문이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종말을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를 알려주며 또 종말에 대한 그릇된 주장을 걸러낼 수 있는 기준을 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때와 징조를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징조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고 때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때에 대한 말씀은 32절에 가서야 나오는데요.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영어 표현에 ‘Only God knows.’ 그러니까 ‘하나님만 아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래서 결국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32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딱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예수님 자신도 모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과장일까요? 사실일까요? 저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사람이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알려질 수 없는 때는 예수님도 알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일로 흥분한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가 드디어 온 것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 속의 때와 시기는 인간이 알래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허용된 범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혹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사건들 조차 인간이 그 정확한 때를 아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 우주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정확하게 아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이 때를 정확하게 아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 때를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만약 우리가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주님이 오실 것을 안다면 우리 삶이 어떻게 될까요? 과연 우리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일이 가능할까요? 만약 우리가 그 때를 정확하게 안다면 우리는 모든 일을 올스톱하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때와 시기에 대한 지식을 준다고 주장하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단에 빠진 사람들 중에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학교도 그만두고 직장도 그만둡니다. 자녀도 남편도 가정도… 정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오로지 주님 오실 날만 기다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때를 알면 우리가 이렇게 망가지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에라도 그 때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혹시 주님의 재림의 때가 궁금하십니까? 이제 때에 대한 궁금증은 아얘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궁금해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을 뿐더러 알아 봤자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보거든 무조건 가짜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아, 지금 내가 예수님 보다도 높아지려고 하고 있구나. 굉장히 교만해 지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들로 여러분의 궁금증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무식’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종말의 때에 관한 한 우리는 거룩하게 무식해야 합니다. 


주님이 예루살렘 멸망의 첫번째 징조로 알려주신 것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주후 70년쯤 유대 땅은 굉장히 불안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였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이단들이 횡행했는데요. 그런 이단의 우두머리 중에서는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내가 그다’라고 주장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을 명심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절대로 이런 종류의 이단에 빠질 염려는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이단들에 비해서 우리나라 이단들은 정말 대범합니다. 그저 내가 진리를 안다, 내가 선지자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버젓이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성령님이다,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주장합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주장에 딸려가는 사람이 우리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성령님이다 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되시는 하나님은 단 한 분 성자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도 사람이 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래도 가능한 주장은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하는 주장인데, 이것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다시 오실 때는 처음 오실 때와 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 사람으로, 말 구유에서 여인의 몸을 빌어 아무도 모르게 태어나셨지만 두번째 오실 때에는 온 우주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라도 이런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재림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그다”라고 말하는 그것 자체가 자신이 가짜임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단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보이는 현상을 보면 안됩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능력을 행할 수 있으니까요.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삼위 하나님 중 어떤 분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자신이 가짜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좀 더 넓게 생각해 본다면 “나만 진짜다”라고 주장하는 모든 종파는 위험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다”라고 하는 주장의 조금 다른 모습에 불과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징조와 관련하여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고 또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른다고 다 진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성공할 것이니까요. 우리가 이단에 속지 않으려면 그래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는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을 깨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숫자와 규모에 속아서 이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속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알려 주신 징조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후 70년 어간에 로마와 로마의 식민지 경내의 상황은 굉장히 어수선 했습니다. 식민지에서 여러 폭동이 일어나 그 중에서는 커다란 전쟁으로 번진 일도 있었고, 특히 네로가 죽은 후에 로마에서는 내전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멸망당하게 만든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해서 일으킨 반란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곳곳에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록을 보면 주후 61년에는 라오디게아에, 그리고 62년에는 폼페이에 커다란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46년에는 유대가 커다란 가뭄에 시달렸고 네로 통치 말기에는 로마에서마저도 식량 문제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 또한 종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기근이나 재앙 그리고 전쟁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마치 세상의 종말인 양 떠들어 대곤 합니다. 이것 봐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진과 기근, 커다란 전쟁이 있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미 인류는 두 번의 세계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 아프리카 땅에서는 수 십년 동안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나라들이 있으며, 또 하루에서 수 만 명씩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커다란 지진과 쓰나미도 계속되고 있고요. 호주에서는 더워 죽겠다고 하는데, 미국은 영하 40-50도까지 떨어져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긴 시간이 흘러갔던 때가 없었습니다. 전쟁만 놓고 본다면 알려진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이 없던 기간은 단지 268년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종말의 시기를 이런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이런 일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이니 두려워하고 당황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소식들이 많이 들려오면 그 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주님의 말씀대로 때가 되면 산으로 도망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때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있고, 역사의 시계 바늘은 그 정해진 때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 뿐만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의 모든 시대는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때는 주님이 다시오시는 때가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굉장히 잘 알려진 신학적인 설명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종말은 곧 그 개인에게 있어서 우주의 종말이다”라는 설명입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우주의 종말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다음에는 그 이전에 살았던 삶에 대해서 만회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종말이 언제 올까 궁금해 하고 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가 언제 오든지 지금 그 때를 영광스럽게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 때는 두려움의 때가 아니라 오히려 소망의 때가 될 것입니다. 설혹 이전보다 더 자주 기근과 재앙, 그리고 지진이나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그래서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흔든다면, 그 때는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영적으로 정신을 차리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그게 그런 일들을 최고로 유익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9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은 정확하게 초대교회 시대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굳이 역사를 뒤져서 찾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정말로 사도들이 공회와 회당에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재판을 받기 위해서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이 일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려면 이런 일들은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일부러 자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그렇게 되는 것 자체가 그런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기회가 될 것이니 무엇을 말해야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정말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경우 공회에서 당당하게 성령을 의지하여 자신을 변호한 일로 자신을 심문하는 기라성같은 공회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말로 왕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과 똑같은 부르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을 따라서 살고 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소명이 있으니까요. 이것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실제적인 불이익과 어려움을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이유로,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이유로 가족이 동료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회당처럼 공회처럼 권력자들과 왕들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들과의 갈등과 오해를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대한 지혜롭게 처신해야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어려움이라면 그 때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해야할 때입니다. 주님은 “말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신앙 때문이라면, 복음 때문이라면 그 일은 분명히 성령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그 분이 나서서 그 분의 지혜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 때문이라면 그리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절대로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해야 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성령님께 의지하여 겸손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주님 오심을 기다리면서 복음을 믿으며 또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인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말씀의 중간매듭을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궁금해 하기도 했지만 두려워 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이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분명히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 모든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분명히 성전을 무너질 것입니다. 그 화려하고 견고하며, 실제로 무너뜨리는 데에만 1년이 넘게 걸리는 그 웅장한 성전도 분명히 무너질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서 인내하는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진리이며, 또 그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는 요한계시록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다가오고 있고 그 징조들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온갖 그럴 듯한 이야기들 대신에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또한 그 어떤 흉한 소문에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지혜롭지 못하게 여러움을 자초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레 겁먹고 근심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복음 앞에서 주눅들지 말고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믿음을 지키십시오. 그 어떤 이유로건 여러분의 믿음에 손해를 보는 선택은 하지 마시고, 그 어떤 어려움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믿음을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쁨 가운데 만나는 행복한 신부들이 될 것입니다. 


항상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마시고 바른 분별력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