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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2. 23. 주일오전 -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마가복음 64)



막1412to21 - 무교절의 첫 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마가64).pdf


20140223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12-21절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세 번의 유월절을 보내셨습니다.성경에 제자들과 함께 보낸 첫번째와 두번째 유월절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세번째 유월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이야기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예로부터 유월절 만찬을 갖는 날이었습니다. 이 만찬이 곧 유월절을 유월절로 만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려면 이 만찬을 꼭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만찬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궁금함을 넘어서서 슬슬 걱정거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넌지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십니까?” 원래 유월절 만찬 준비는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장소며, 음식이며 모든 것을 제자들이 준비하고 예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야기 하듯이 예수님은 선생님이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만찬을 준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장소도 구할 수가 없었고 음식을 마련할 길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수님께 묻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제자들이 맞딱뜨렸던 그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그 질문이 예수님의 해답을 끌어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살고 또 하나님을 섬기다가 보면 종종 이런 비슷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일하면서 목회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를 목회자로 세우셨고 또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 보니 원래 목회라는 것이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에게 맡겨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언가 주님을 섬기는 일이 나에게 맡겨 졌는데 나에게 충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 일을 위한 열정까지도 부족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냥 내 힘과 내 의지로 없는 열정도 만들어 내야하고 될 때까지 끙끙거려야 할까요? 그러다가 지치고 낙심하고 그렇게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제자들처럼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능력도 부족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주님이 도와주세요.”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묻기 시작하면 답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정말로 전적으로 주님께 묻고 의지하면 주님이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두 사람을 선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이 어떤 집이든지 그 집의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시던데요?’라고 말해라. 그러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만찬을 준비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답이고 해결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내에 들어가게 될 때 만날 사람이며, 그 사람의 주인과의 대화에서 사용해야 할 말이며, 그러면 그 집 주인이 보여줄 행동과 제공해 줄 방까지 모든 것을 아주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어디서 많이 보던 말씀인 것 같습니다. 혹시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타고 들어가실 나귀를 구해오라고 하실 때 하신 말씀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 때도 주님은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그냥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건너편 마을로 갔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나귀를 발견했고, 예수님의 말씀해 주신 것과 똑같은 질문을 받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해 주신 대답을 하고는 그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만찬 준비 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건도 예수님 말씀 그대로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 눈 앞에 한 남자가 물동이를 들고 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를 졸졸 따라갔죠. 그리고는 그 남자가 들어가는 집으로 무조건 쳐 들어가서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던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집 주인이 바보인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다락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기다가 유월절 만찬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전에 나귀를 구하러 보내실 때도 그러셨지만 지금 유월절 만찬을 나눌 장소를 구하러 보내시면서도 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준비가 거의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며칠 전부터 제자들에게 과제를 맡기실 때마다 이렇게 똑같은 방법을 반복해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들의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는데요. 만약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똑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시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죠?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게 하되 확실히 놓치지 않고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교육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둘을 짝지어 보내셨던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주고 어디로 보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록은 마가복음 6장 6절 이하에 나오는데요.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고는 전도실습을 보내셨습니다. 앞으로 내가 없더라도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도 주님은 길지는 않지만 상당히 자세하게 제자들이 따라야할 규칙들을 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고 그 결과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귀를 구하는 일과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일은 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실습을 시키셨던 일과 같은 맥락에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떠날 때가 눈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일 까지도 제자들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꼭 가르쳐 주시고 싶어하셨던 것이 무엇일까요? 또 그래서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가장 크게 배우고 또 믿어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또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이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만이 아시게 되어 있는 중요한 일들의 정확한 시기만 빼면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하고자 하시는 대로 섭리하시고 움직여 가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하나도 주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동이를 들고가는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이 일의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두번째로 그 사람을 따라갔더니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에서 그 집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 아닐 확률, 그리고 그가 들어간 집에 때마침 그 집 주인이 있어서 그를 만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요? 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그 주인이 아무런 말도 없이 방을 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또 음식은 어떻습니까? 방을 내주었다고 음식까지 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예수님까지 장정 열 세 사람이 만찬을 벌일 만큼의 음식까지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완전히 맞아 떨어질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제가 수학을 잘 못해서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하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요? 아니라고 생각되시면 오늘 한 번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마치고 교회 앞에서 빨간 가방 들고 가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따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주인을 찾아보십시오. 주인을 만나게 되거들랑 밥 한끼 달라고 해 보십시오. 그렇게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해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병원에 끌려가거나 물벼락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또 처음부터 난항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도 빨간 가방 들고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유월절 만찬 준비 과정은 하나 하나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또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배우고 또 믿게 해 주시려고 그 모든 과정 하나 하나가 딱 맞아 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면서 성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내 삶에 불확실하고 불리한 것들을 더 많아지게 하는 선택이니까요. 당장 사업하는 성도가 현행법을 모두 지키는 한 가지 일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얼마나 불리해 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보다 확실하고 또 보장된 삶의 방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고 또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그런 모양의 삶을 맡기신 우리 주님이시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물론 처음부터 아무런 저항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 말도 안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 하나 그대로 따를 때, 제자들은 ‘이건 말도 안된다’라는 마음의 저항을 이겨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 저항감을 이겨내고 가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 하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어 간다는 것을 확인했겠지만 실은 그 하나 하나의 과정에도 또 다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르는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또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그것을 배우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의 말이나 지금까지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두번째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던 것은 일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런 우리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죠. 그런데, 이것을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 하나 완벽하게 세팅해 놓으신 무대에 제자들이 들어가서 맡겨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필이면 왜 이상하게 물동이를 지고 가는 남자야? 저 비단 옷 입고 가는 사람 따라가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왜 저 집이야 저 옆에 있는 더 좋은 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례하게 주인에게 어떻게 이렇게 말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정해주신 환경과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님의 뜻대로 대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도 평안하게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있었고, 풍성한 식탁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나의 무대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무대 위에서 함께 맡겨진 역할을 연기해야할 연기자들 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다 보면 무대가 바뀔 때도 있고 또 만나는 사람들이 바뀔 때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나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당장은 그 하나 하나의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이 무슨 목적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결국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환경들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완벽한 무대와 배우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놓여있는 환경이 정말 척박하고 힘드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 보면 “왜 나만?”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만큼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지금 이 순간에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의 무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여러분이 만나고 함께 살고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까다롭고 힘든 사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저절로 ‘귀신은 뭐하나?’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또한 이 무대 위에서 나와 함께 연기하는 연기자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내 입장에서는 악역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연극에 그 악역도 꼭 필요하셔서 거기 두셨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함이 드러나고 그 역할을 통해 우리가 성숙해 가려면 악인 또한 분명히 필요할테니까 말입니다. 무대도 내가 바꿀 수 없습니다. 배우들도 내가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그런 것들은 주님께서 바꿔 주실 것이고, 또 그러는 동안 나에게도 내공이라는 것이 생겨서 그런 것들이 바뀌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거의 마지막에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랐을 때 만나게 될 결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집 주인이 큰 다락방을 보여줄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쨋든 주인이 다락방 하나를 보여줄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콕 꼬집어서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만나고 누리며 살아갑니다. 준비된 사람을 만납니다. 또 준비된 도움을 받습니다. 앞서 인용했던 마가복음 6장 6절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이것은 더 좋은 집 있다고 여기 저기 동가식 서가숙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한 어느 곳에 가든지 그렇게 제자들을 영접하고 떠날 때까지 머물게 해 줄 사람들을 준비해 놓을테니 그 집에 머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앞에 나온 청빈에 대한 말씀과 연결해 보면 더 명확해 집니다. 그렇게 청빈하게 여행을 하라고 하신 이유는 가는 곳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한 공급자를 준비해 놓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제자들이 경험한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너희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런 저런 미리 준비된 은혜를 받게 될거야’라는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굉장히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며 또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이미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만나는 것들은 그렇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들이 됩니다. 제가 계속해서 배우게 되는 신앙에 대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받을 때, 그것을 그런 은혜로 알아차리고 그런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뜻대로, 스스로가 갈 길을 정한 사람들은 이 은혜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자기가 결정하고 노력한 것의 결과로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면 진짜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은혜가 있어도 그 은혜를 그런 은혜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리지 못한 은혜는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은혜로 여겨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앙이 되게 하느냐 아니면 형식적인 신앙에 남아있게 하느냐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은혜들을 은혜로 알고 그 은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분이 됩니다. 그 입술에서 저절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결정과 자기 계획에 따라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고백이 없고, 있어도 굉장히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빈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그의 신앙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확신 넘치는 신앙이 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들도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혼자서 끙끙 거리고, 혼자 없는 답을 찾아보려고 고민하지 말고 우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면 거기 순종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당장에는 없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주어진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도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맡겨진 역할과 허락하시는 만남에 주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며 또 움직여 가고 계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 속에서 살며 또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바로 이 은혜가 있어야 비로소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다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런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불안하고 책임질 수 없는 세상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여 가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다 알 수 없고, 또 두번째 걸음을 첫번째 걸음보다 먼저 옮겨 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은혜를 만나고 그 은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려주시는 말씀에 최선을 다해서 순종함으로써 항상 주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풍성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