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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04. 새벽예배 -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느니라(창세기 110)


창3133to55 -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느니라(창110).pdf


20140204D (#1).mp3.zip






본   문 : 창세기 31장 33-55절



교회 안의 인간관계는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교회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을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저런 프로그램이며 행사를 하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성도간의 참된 친밀함을 만들어 내는 데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분위기 좋다고 하던 교회들도 작은 갈등과 어려움도 이기지 못하고 분열하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그 모임의 구성원들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결국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빠져버리니 그 관계는 무의미한 것을 지나서 기초를 잃어버린 관계가 되고, 그러니 좋을 때는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만 못한 관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없어지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미치시는 영향력이 적어질 때는 개인의 삶이든 서로 간의 관계이든 커다란 문제가 생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말입니다. 그래야 평안할 수 있고, 또 혹시 문제가 생겼을 때도 부드럽게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또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수차례 살펴본 것처럼 야곱은 하나님을 진실로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시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야 말로 세상과 하나님, 그리고 자기 능력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런 야곱에 대한 이야기들 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전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지 못했던 야곱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야곱이 그런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야곱을 자신의 언약백성으로 여기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불미스럽고 고통스러운 일들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지 않았던 야곱 자신의 책임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았을 때, 야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그가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고 안깐힘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도 넘었습니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을 때도 있었죠. 그렇지만 결국 그래서 사람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에게서도, 그리고 삼촌에게서도 정말 목숨을 걸고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야곱의 나중 이름이 이스라엘이어서 그런지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야곱의 삶을 쏙 빼닮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이름이죠. 저는 이 이름의 의미를 이렇게 풉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이스라엘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이나 혹은 다른 나라들과 승부를 내야하는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승부를 내야 하는 백성들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 그래서 얻은 답은 언제나 정답이 되지만,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답을 얻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온전한 백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때는 이스라엘은 주변의 그 어떤 나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주변의 나라들과 사람들을 두려워 하며 그들의 괴롭힘을 당하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야곱 개인의 역사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너무나 쏙 빼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아서 알고 있지만 야곱의 삶은 야곱 혼자서 풀어가려고 할 때는 더 복잡하게 꼬여가고 더 무너져 가기만 했습니다. 야곱의 인생이 그나마 자기 궤도를 되찾게 되었던 것은 자기 삶에 개입해 오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였습니다. 그 때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는 못했지만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를 되찾기 시작하면서 부터 꼬일대로 꼬여버린 실타래의 마지막 실마리가 풀리듯이 그렇게 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지막에 꼬였던 실마리가 풀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라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죽이고서 자기 자녀들과 재산을 빼앗아 돌아가려고 했지만 라반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라반을 협박하시고 그 시도를 원천봉쇄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찾아왔던 라반은 야곱에게 어떤 액션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허세만 조금 부릴 수 있었을 뿐입니다. 더 이상 서로 상관하지 말고 살자는 의미의 언약을 맺자고 요구했던 쪽 또한 야곱이 아니라 라반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 딸들을 학대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 하고 서로의 영역으로 침략하지 말자고 언약을 맺게 한 후에, 여갈사하두다 혹은 길르엣이라는 돌 무더기를 그 증거물로 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증인이 되신다는 의미의 “미스바”라는 이름을 또 붙여주었습니다. 또 야곱은 산에서 하나님게 제사를 드린 후에 라반의 아들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다음 날 아침 자기 딸들과 손주들에게 축복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단 라반과의 모든 일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었으며, 우리가 오늘날의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야곱의 인생과 야곱의 인생을 닮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성도인 우리 개인이나 교회를 위한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어도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다스리심과 돌보심, 그리고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을지라도 삶의 틀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틀에 자신을 맞추면서 살아가야 가장 순적하고 평안한 삶,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될 때, 가장 평안하고 아름다우며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빨리 자신의 삶에 개입해 오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모시고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엉킨 실타래 같은 삶도 풀리게 되고 다시 제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혹시 삶이 엉클어지고 복잡해 지기만 하시거든, 성도들 간에 풀려지지 않는 문제가 있으시거든 그 때는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챙겨보시기 바랍니다. 내 삶 속에,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내가 그 분을 정말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지 챙겨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개인의 삶도 또 교회 안에서의 관계도 주님께서 묶인 곳을 풀어주시고 막힌 곳을 뚫어주시는 은혜로 충만하여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