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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07.새벽예배 - 얍복을 건널새(창세기 113)



창3221to32 - 얍복 나루를 건널새(창113) .pdf


20140207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2장 13-32절(21-32절)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면 특별하게 회심을 경험하는 순간이 꼭 있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정말 진심을 담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과거에 하나님과의 강렬한 만남이 있었고 또 회심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신앙이란 인격과 인격 사이의 만남이고 또 관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신앙에는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만남과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는 사건이 꼭 필요함을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자신이 기억할만한 만남과 돌이킴의 사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먼 길을 달려와 이제 고향 땅 앞에 있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건너 보내고 식구들까지 다 건너 보냈지만 정작 그 땅을 밟아야 할 야곱은 차마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냥 나루터에 머물러 있습니다. 얍복 나루터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는 나루터 였습니다. 야곱은 이제 그 동안의 거칠고 거친 광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문 앞에서 머뭇거리면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는데요, 두려움이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생겨나고 또 더 강해지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머뭇거렸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의 그 엄청난 은혜들과 보호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인 신뢰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항상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형 에서가 있으니까요. 사실 에서가 야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와는 상관이 없이 야곱은 계속해서 형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절대로 에서를 보면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형에게 했던 짓이 있었으니까요. 이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 믿음이 확실할수록 야곱은 약속의 땅으로 더 쉽게 건너갈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믿음이 희미해지면 약속에 땅에 들어가 거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보면 약속의 땅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약속의 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삶을 통해 보여주시는 원리는 오늘 우리를 위한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를 건너려면 야곱에게는 회심이 필요했습니다. 이제야 말로 자기 자신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가겠다는 그 회심을 통해서 참 믿음의 사람이 되는 일이 꼭 필요했습니다. 만약 이 믿음이 없다면 강을 건너기도 힘들 뿐더러 그렇게 가나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들 여전히 두려움 속에서 평강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가나안은 여전히 광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것은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다 끝난 것일까요?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저절로 흔들림 없는 평안한 삶이 될까요? 우리가 참된 신앙의 복과 능력을 누리면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천국이 아니라 가나안에서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개 가나안을 천국으로 비유하는데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물론 가나안은 천국을 가리키는 곳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는 여전히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여전히 그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은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땅일 뿐만이 아니라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땅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후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정말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들려주는 메세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고난과 두려움,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으니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수많은 시험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는 평안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완성이 아니라 출발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받은 첫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야곱이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이스라엘로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참된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복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달려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진실로 알 수 있고 또 누릴 수 있는 복이니까요. 


성도들이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신앙을 따라 사는 삶이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완성이 아니라 출발지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저 얍복 나루터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삶을 ‘믿음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삶이란 믿음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싸움, 그렇지만 믿음만 있으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싸움터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삶은 가나안에서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은 얍복 나루를 건널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꼭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가나안은 더 큰 두려움의 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구원얻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도로 살아갈 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은 패배와 두려움을 넘어서서 승리하는 삶, 정말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며 사는 평안하고 든든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삶이 가나안이 두려움을 넘어선 평안과 승리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회심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진실로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얍복나루를 건너셨듯이 계속해서 그 믿음으로,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러분의 삶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함과 평안함 넘치는 복된 땅으로 가꾸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