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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2.09. 주일오전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가복음 62)


막1328to37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가6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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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3장 28-37절



정신없이 살다가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느 해 인가 너무 정신없고 생각없이 살다가 보니 계절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도 모르다가 문득 창밖에 매달린 노랗게 변해버린 은행나무의 잎사귀를 보면서 가을이 된지 벌써 한참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흘려버린 시간들은 마치 도둑맞아 없어져 버린 시간 같았고, 은행나무 잎사귀는 파랗다가 어느 순간 노랗게 변해버린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계절은 바뀌고 있었습니다. 은행나무 잎사귀는 갑자기 노랗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천천히 노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제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멸망이 코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결정적인 징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상황을 잘못 읽으면 괜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아까운 목숨만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가 멸망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를 알려주시고 미리 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말씀들 끝에 덧붙여 주신 마지막 경고와 주의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앞에서 해 주신 말씀들을 알고 있어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징조들이 눈 앞에서 벌어져도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고 그러면 피할 기회를 놓쳐버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여름의 초입이 되면 죽은 것같이 딱딱했던 가지가 갑자기 연해지면서 잎사귀가 무성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무화과 나무가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가 이렇게 변해도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 그 무화과 나무 앞을 지나치면서도 그 나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통 다른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무화과 나무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뜨거운 여름이 되어서야 땀을 닦으면서 그제서야 무화과 나무를 쳐다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보거든…알라”고 하셨습니다. 보는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징조라는 것이 저절로 누구에게나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징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무화과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나무의 변화를 통해서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계절의 변화를 가르쳐 주니까요. 징조라는 것은 정말 놓치지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면 절대로 안됩니다. 징조를 놓치면 진짜도 놓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놀랍게도 예수님의 예언들은 정말 역사 속에서 말씀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일들이 현실이 되었고 결국 예루살렘도 그렇게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 가지는 놀라운 점이고 또 무서운 점입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아무리 대단하게 보여도 그저 주님께 기대어 잠시 있을 뿐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의 영원한 말씀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으로 “이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심판이 이루어질 시기에 대한 대략적인 말씀이기도 하지만 예수님 세대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심판을 당할 피할 수 없는 당사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 세대 사람들은 왜 그런 안타까운 운명에 놓여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 세대가 예수님의 믿으려고 하지 않고 표적만 구하는 세대였고,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거절하고 죽이게 될 악한 종들의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원한 시각에서 볼 때 삶이란 결국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라 기초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영원한 것을 자신의 기초로 삼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영원히 지탱해 줄만큼 변함없고 든든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 위에 세워진 인생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기초는 없습니다. 다른 기초는 우리의 인생을 잠시 화려하게 서 있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님의 심판 앞에서 영원히 서 있게 해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 세대의 사람들처럼 다른 것들을 붙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기초 없는 건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예수님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도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3절에서도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라고 말씀하셨고, 35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주님은 심판의 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에 다섯 번이나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심판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인간은 그것이 예루살렘의 심판이든, 마지막 심판이든 그 일이 일어날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습니다. 우선 이것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어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교만이며, 자꾸 그것을 알려고 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를 미혹당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잠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알려 주시기 위해서 종들에게 자기 집을 맡기고 먼 곳으로 떠나는 집 주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집 주인이 다른 종들, 특별히 문지기에게 요구한 것은 “깨어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부탁이 아닙니다. 주인이 종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종이라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종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자도 좋지만 깨어 있으면 더 좋다 이런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주님은 비유에 나오는 종들과 문지기,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제자들, 그리고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들은 모두가 다 같은 처지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다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는 처지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주인은 자기가 언제 돌아올지 전혀 언지를 주지 않고서 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원래 누군가 분명히 오기는 오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입니까? 바짝 긴장하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지만 대개 그런 경우에는 우리에게는 그 사람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 보다는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크게 여겨지고 이것이 기다리는 우리들의 긴장을 풀어 버립니다. 이것이 집 주인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임무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부모들, 특히 엄마가 출타할 때는 자녀들을 그냥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집을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꼭 임무를 맡깁니다. “이 책 여기부터 여기까지 읽어 놔. 이 문제집 여기까지 꼭 풀어놔야 해.”하고 표시까지 해서 손에 쥐어주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집을 떠난 순간부터 아이들은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엄마가 돌아올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엄마가 벌써 올 리가 없어. 아직 일이 한참 남았을 꺼야. 조금 더 놀아도 돼. 조금 더 쉬다가 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맡겨진 일을 뒤로 미뤄 놓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문을 열고 들이닥칩니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후다닥 후다닥 책을 펴고 공부하는 척을 해 보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후입니다. 남은 것은 엄마의 잔소리와 호통 밖에 없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엄마는 언제 들어와도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이고, 언제 돌아와도 갑자기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와도 당황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해야 할 일을 미리 해 놓았을 때는 너무나 여유롭고 당당한 태도로 엄마를 맞이합니다. 하던 놀이를 계속하면서 “응. 엄마 왔어? 근데 왜 인제 왔어?”하고 여유를 부립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일을 다 해 놓았을 때는 엄마가 언제 들어와도 제 때 들어온 것입니다. 충분히 늦게 들어온 것입니다. 돌아오는 엄마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엄마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를 이렇게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런데, 주님이 주인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예로 들어 주신 때가 참 재미있습니다. 모두 다 어떤 때입니까? 해가 진 후부터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흔히 우리가 밤이라고 부르는 시간이죠. 종들의 입장에서 주인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가장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냥 마음 놓고 잠들기가 너무 쉽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만약 그 때 돌아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주인이,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각이 밤이라는 뜻일까요? 밤에 오실 것이니 밤에도 잠자지 말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듣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용합니다. 시각, 촉각, 청각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 하나의 감각에는 물리적인 차원이 있고 또 심리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예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이것을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계절이 한 참 바뀐 뒤에야 노랗게 변해버린 은행잎을 보았지만 실제로 저는 그 이전에도 그 은행잎을 굉장히 여러 차례 보았을 것입니다. 그 잎이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 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을 리가 없죠. 그 은행나무는 항상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 창 밖에 서 있었으니까요. 드나들면서 그 나무를 보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초록색 은행잎이 노랗게 변할 때까지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제가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그 나무를 보았어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그 나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끔씩 제 아내에게 자기 이야기를 왜 듣지 않느냐고 혼이 날 때가 있는데요. 사실 그 때도 제가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듣기는 다 들었죠. 그런데 그 이야기가 기억이 나질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리적인 귀로는 들었지만 심리적인 귀는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이든 귀든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들을 때에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눈에 들어와도 귀를 울려도 전혀 인식되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하루 안에는 낮도 있고 밤도 있습니다. 낮은 깨어있는 시간이고 밤은 잠들어 있는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심리적이고 영적으로 보면 시간은 이렇게 단순하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심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낮도 밤이 될 수 있고 밤도 낮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생 전체가 낮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인생 전체가 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면에서 본다면 어떤 시간들이 밤이고 어떤 시간들이 낮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생각하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시간은 밤이어도 낮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심지어는 밤에 잠을 자는 시간도 깨어있는 낮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항상 잠들어 있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가장 생생하게 깨어있는 대낮도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밤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소망이 분명한 사람들의 삶에는 저물 때, 밤중, 닭울 때, 그리고 새벽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은 절대로 주인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혼의 밤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시더라도 우리의 잠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고, 우리의 기대대로 주인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 영혼의 밤을 줄일 수 있고 또 없앨 수 있을까요? 영혼의 밤이 우리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런 시간을 없애고 항상 깨어 있으려면 먼저 무엇이 우리 영혼을 잠들게 하는지 그것부터 알아보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 굉장히 많겠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부터 39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마치 노아 때의 홍수와 같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경험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일단 절대로 홍수가 오지 않는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 밖에 비가 퍼붓고 있을 때도 그것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홍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물에 빠져 휩쓸려 가면서, 그렇게 온 세상에 물에 잠기는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아차!’했겠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될만한 아주 특별한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생각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전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죄도 아닙니다. 그저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들이 이렇게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으면서 심판이 임하는 것도 생각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다면 이런 사람들은 둘 중에 어디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일까요? 현실적인 만족과 편안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입니까? 현실적인 만족과 편안함일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현실의 만족과 편안함만을 생각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는 잠이 들게 됩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서 살아가는 삶은 그 삶 전체가 캄캄한 밤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깨어서 주님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됩니다. 집 주인에게 잠들어 있는 모습 밖에 보여줄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과 현실이 하나님의 자리에 놓인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 중에는 사람들이 흔히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남들도 다 그러던데, 남들도 다 그렇게 살던데. 인생 뭐 있어?’라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은 사람이 가는 길에 대해서 막연하고 맹목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내가 거기 맞추지 못하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맞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고 그래서 나도 그래야 하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법이나 건전한 상식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반대인 것들도 많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택한 것이기 때문에 틀린 것이고, 거기 맞추면 안되는 그런 것들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두 말씀 모두 많은 사람들이 따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한 것과 피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르지 못한 시대정신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시대정신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시대정신은 과히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성도들은 점점 더 편하고 부담없는 신앙생활, 가볍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은 그러한 성도들의 욕구에 맞춰서 점점 가벼워져 가고만 있습니다. 이것이 커다란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 제대로 믿어 보려고 애쓰는 것, 기도에 헌신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보같이 여겨집니다. 그렇게 불편하게 예수 믿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고, 나만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꼭 내가 틀린 것같은 생각까지 들죠. 그런데, 우리가 이런 생각에 지면 우리 영혼은 그 때부터 슬슬 잠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 영혼에 캄캄한 밤이 찾아오기 시작 됩니다. 온 세상이 흐지부지 예수를 믿어도 나는 그러면 안됩니다. 온 세상이 잠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도 나는 그러면 안됩니다. 여러분, 예수는 부담스럽게 믿을 수록 좋습니다. 예수는 더 진지하게 믿을 수록 더 좋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잠들지 말라고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서 주님을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 주님이 돌아오시든지 우리가 기쁘고 넉넉한 마음으로 영광스럽게 주님을 만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실까요? 그게 예루살렘의 멸망이든, 이 세상의 종말이든, 아니면 우리 개인의 죽음이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번개처럼 우리 위에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면 우리들은 예외 없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잠들지 마십시오. 항상 깨어 계시기 바랍니다. 현실이든 시대정신이든 그 무엇도 여러분을 잠들지 못하게 하도록 항상 여러분 스스로를 깨우시기 바랍니다. 


항상 마지막 때, 주님 만날 때를 생각하며 살아야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야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해도 두려움과 부끄러움 없이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항상 깨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언제 오시든지 밝은 얼굴로 만날 준비를 하고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우리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이 우리 평생의 가장 환하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