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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2.16. 주일오전 -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가복음 63)


막1401to11 -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가63).pdf


20140216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1-11절



TV 프로그램 중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나 동물들 혹은 이야기들을 찾아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요. 가끔씩 그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다양하고 독특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도 참 심심하시지는 않으시겠다는 우스운 생각도 하곤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다 지켜보고 계실 테니까요. 한 번은 주인공 중에서 모형비행기를 정말 좋아하시는 한 분이 나왔는데요. 사시는 집에 온통 널린 것이 모형 비행기였습니다. 어떤 것은 사람 키만한 것도 있었는데, 아내 되시는 분이 그 비행기에 손을 대려고 하니까 “어… 그렇게 함부로 손대면 안돼! 그게 얼마 짜리인데!”라고 했다가 도대체 얼마 짜리냐고 묻는 아내에게 하는 수 없이 “얼마 안해. 천만원 조금 넘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왔습니다. 방송 중이니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듣고 아내 되시는 분의 얼굴에 그려진 정말 어의 없어 하는 표정 속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습니다 . 지켜 보는 저도 어이가 없고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것을 천 만원 넘게 주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으니까요. 사람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아낌없이 헌신하게 되는 대상들은 정말 다양한 것 같습니다.  


유월절 명절 기간을 이틀 남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돌아다니시면서 이런 저런 사역을 하고 계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영향력과 인기는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당장 죽이지 못했던 것은 명절을 명절답게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유월절은 대제사장들이 가장 긴장하고 경계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상하죠? 명절을 가장 기뻐해야 할 대제사장들이 오히려 가장 경계를 했다니 말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친로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으면서도 로마 당국으로 부터 가장 큰 혜택을 입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풀려난 것을 기념하는 자유와 해방의 절기였습니다. 게다가 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야 말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습니다. 이것은 이 절기가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에 가장 적합한 때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에 붙어서 이런 저런 유익을 챙기던 대제사장 세력에게 이것보다 두려운 것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란은 곧 자기들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기에 그 당시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던 예수님을 잘못도 없이 붙잡아 죽인다는 것은 마치 반란이 일어나라고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기를 피해서 예수님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전에 나병을 고쳐주었던 시몬의 집에 초대되어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때는 유월절이고 그렇게 병을 고쳐 주신 사람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식탁은 얼마나 풍성하고 기쁜 잔치 였겠습니까? 차려진 것이라고는 별 볼일 없는 소찬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권력자의 만찬도 흉내내지 못할 그런 풍성한 교제의 자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은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식사하고 있는 자리에 어떤 여인 하나가 불쑥 끼어들더니 ‘매우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병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은 거의가 다 노발대발 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가? 내다 팔면 족히 300데나리온 더 받을텐데 그러려면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나 쓸 일이지!”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여인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이 여인을 나무라면서 왜 하필이면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들먹였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교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또 가치있게 여기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선행은 하늘에 가장 큰 상급을 쌓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중요한 절기 때가 되면 이웃을 돕는 일은 더욱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당시의 상식으로 본다면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인의 그런 행동은 충분히 그만큼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향유는 그렇게 한 번에 한 사람의 머리에 부어버리기에는 너무 값진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당시 기준으로 노동자의 1년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도 나오듯이 200데나리온이면 5000명을 먹일 수 있을 정도니까 300데나리온은 꽤 큰 거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향유를 한 사람의 머리에 그것도 한 번에 모두 부어버린다? 제자들은 그런 그 여인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면서 그 여인을 나무랐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만 보면 제자들의 계산과 판단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주 정확하고 이성적인 판단이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대신에 그것을 팔아서 굶어 죽을 형편에 있는 한 가족을 1년동안 먹여주는 일에 사용한다면 얼마나 더 현실적이고 효율적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가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누누히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해 오셨습니다. 때가 되면 당국자들의 손에 붙들려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귀에는 주님의 그런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저 기분 나쁘게 그들의 귀를 울리는 소음에 불과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그 값비싼 향유, 어찌보면 자신의 전부이며, 비상시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향유 한 병 전부를 아낌 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여인의 행동을 아주 특별한 의미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 보시기에 이 여인은 쓸 데 없는 일에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여인은 그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서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귀한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죽게될 것을 알고서 그 죽음을 준비해 주려고 미리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이 여인은 아주 기괴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시신에게나 해 주어야 할 장례절차를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것일까요? 물론 머리카락은 유대사회에서 사람의 영광이기 때문에 거기에 향유를 발라 주는 것은 손님을 환대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는 이렇게 한 병을 다 쏟아붓지 않습니다. 그저 한 방울이나 혹은 작은 양을 덜어서 머리에 부드럽게 발라 줍니다. 환대를 위해서 기름 한 병을 쏟아붓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아주 이상한 행동이 되고 또 결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양을 머리에 쏟아붓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일 뒤에는 구약성경의 특별한 이야기들이 놓여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1절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예식이었습니다. 16장 13절에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역시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절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원래 이 말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야라는 말 자체가 ‘왕’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인의 행동을 충분히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본다면 그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예수님, 당신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메시야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하죠. 원래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지금 공회당에 모여서 예수를 언제 어떻게 죽일까를 모의하고 있는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야요 왕으로 알아보고 인정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 여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그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식사자리에 불쑥 끼어들어온 이름 없는 여인, 오히려 그런 일을 했다고 비난받고 있는 그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여인의 이런 마음과 생각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야와 왕으로 고백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로 받아들이셨고 또 그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에 어떻게 보면 원래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두셨을까요? 단지 예수님 자신이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준비해 주지도 않는 그런 죽음을 당할 것이 서글프고 외로워서 그런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는 그렇게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해 주는 일과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동일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또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다른 왕들과는 전혀 다른 왕이십니다. 다른 왕들은 저 왕궁 안의 빛나는 의자를 그들의 보좌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를 당신의 왕좌로 삼으셨습니다. 또 다른 왕들은 자기가 다스릴 백성들 위에 군림함으로써 왕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의 왕좌인 그 험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내어주심으로써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즉위식은 바로 그 분의 장례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는 일과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은 정확히 같은 일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성도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복음이라고 부릅니까? 복음은 무엇보다도 왕이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하고 또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 오셨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약속된 메시야가 드디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여인의 행동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통해 그런 메시야로, 그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행동은 그렇게 예수님이 메시야시라는 것을 알리는 가장 향기로운 나팔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열 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그 기회를 찾더라”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워야 할 예수님을 오히려 어떻게 죽일까하는 것만 궁리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이 메시야시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여인을 비난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 두 제자들 중 하나는 그런 예수를 돈을 받고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참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우리 영혼을 힘들게 하는 이야기들 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의 중심은 이런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이런 어둡고 슬픈 이야기, 악취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에는 그래도 왕이 되시고 그래도 메시야가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손길을 통해 온 세상의 메시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힘있는 자들의 음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무관심과 충격적인 배신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 여인의 손길을 통해서 당신의 아들이 메시야이심을 온 세상에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행동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가치를 지니게 되었을까요? 우선 우리는 성경이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가 최소한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은 이 향유가 이렇게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집에 있는 기름병 아무거나 들고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그런 향유였고 그래서 나중에 일을 저지르고 나서 아까워서 밤잠을 설치며 한숨을 쉬어 댔을까요? 이 향유는 여인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이 정말 고이 고이 간직했던 최후의 비상금이었고 또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장례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그런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그 여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그 병을 깨뜨렸고 한 병 전부를 예수님의 머리에 아낌 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는 그만큼 가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 제자들 그리고 가룟 유다의 경우는 그 반대였겠죠.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그 정도의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유가 그 머리에 부어질 만큼의 가치를 가진 분으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언제든지 얼마간의 돈과 바꿀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가치를 지닌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딱 그 만큼의 가치로만 예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단 한 번 그 분의 머리를 적시는 일에 전부 사용해도 전혀 아깝다고 여기지 않을만큼 그만큼 가치 있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가복음에서 이 여인을 닮은 또 다른 여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 비록 동전 두 닢이지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던 그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만큼 가치 있는 분이셨고 그래서 그 여인도 기쁘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할 영적인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값어치는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어떤 헌신을 가장 값진 것으로 받아주시고 또 칭찬해 주실까요? 두 여인이 그 답을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의 가치를 평가하시는 기준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만큼의 가치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래서 얼마나 가치를 두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가치 있는 분으로 여기고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최고로 가치 있는 헌신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여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가 겉으로 보이는 헌신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음이 같다면 두 렙돈이나 300 데나리온이나 하나님께는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두 렙돈이든 300 데나리온이든 두 여인에게는 그게 전부였고 또 그 전부를 아낌없이 드린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미망인의 두 렙돈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드린 헌물로, 그리고 그 여인의 향유를 가장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최고의 헌신으로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은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께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헌신이 될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너무 너무 귀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저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아낌 없이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을 위한 가장 가치 있고 향기로운 헌신으로 여기시고 그렇게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이 뜨겁고 기쁜 헌신, 아낌 없이 드리는 헌신이 되지 못하며,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이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예수님을 예수님 만큼의 가치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만 조금 묵상해 보아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변변치 않은 나를 죄에서 건지시고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서, 다함 없는 은혜 가운데 사는 자녀로 받아주시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으로 나셨고 또 그렇게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여인의 향유옥합처럼 깨뜨시고 자신의 귀한 피를 옥합의 향유처럼 흘려 주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랑보다 우리에게 더 보배로운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께 헌신할 때, 우리의 헌신이 크던 작던, 그리고 부족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의 헌신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그래서 예수님의 왕되심을 만천하에 선포했던 그 이름 없는 여인의 가장 값진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가장 영광스럽고 향기로운 도구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제 찬송 한 곡을 부르고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찬송가 94장인데요. 이 찬송가 속에 우리의 속 깊은 고백과 소원을 담아서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 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 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2.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3.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과연 예수님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신 분인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의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온전히 깨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최고로 값진 분이 되어 달라고. 그래서 우리의 헌신과 신앙생활이 주님께도 가장 가치있고 향기로운 그런 것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