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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20. 새벽예배 -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창세기 120)



창3701to04 -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창1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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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37장 1-4절




사람이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거기 매달리게 되는 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고 또 자기 인생이 끝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은 해도 사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 정말로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살아간다면 또 정말로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내 맘대로는 안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편안해 지고 또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인생이 유한하고 그 인생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 짧은 인생동안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또 자기 인생에 맺혀지게 될 열매를 생각하면서 아무런 씨앗이나 가져다 심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씨앗을 골라서 심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열매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할테니까 말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족보를 볼 때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의 인생을 보게 됩니다. 이름과 이름이 이어지며 기록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를 의미하고 또 시간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또 성과를 이루었는가와 상관없이 그저 그렇게 계속 이어져가는 역사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살았던 야곱, 그리고 그렇게 떵떵 거리고 살았던 에서의 후손들, 그리고 세일 지역을 호령했던 호리족속들… 저마다 그 역사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마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지만 어찌보면 그들은 그게 누구든지 전 세대의 뒤를 이어 왔다가 다음 세대에 바통을 물려주고 떠난 이어달리기의 중간 주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저 왔다가 떠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잘 해야 작은 기억 조각이나 이름 석 자 남기고 떠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자기만족이나 사람들의 기억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를 영원히 기억해 줄 하나님의 기억과 인정해 주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연결해 주는 중간주자의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결국 아버지가 살던 마므레에 살게 된 것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을 완전히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역사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이루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래 놓고서 성경은 요셉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본격적으로 야곱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려고 하는 순간 그 바통이 야곱의 자손에게로 넘어가는데, 첫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야곱의 자손들 중에서도 요셉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져 갈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37장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요셉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에 대한 성경의 소개가 그다지 훌륭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지금도 열 일곱 살이면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당시에는 열 일곱 살이면 소년이기는 하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어른으로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이 한 일에 대해서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점잖게 말해서 말한 것이지 일러 바친 것입니다. 스파이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형들이 배 다른 형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야곱의 반응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다른 아들들도 나무라야 하지만 야곱도 혼내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 대신 성경은 그런 요셉에 대한 행동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색동옷이 뭐가 대단하냐 싶으실지 모르지만, 당시의 채색 옷은 왕족이나 귀족들만 입는 특별한 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야곱이 다른 아들들이 아니라 요셉을 자기 후계자로 삼고서 특별대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이 혼자서 색동옷을 입고서 양 떼를 돌보는 형제들과 함께 있었다면 요셉이 형들을 도와서 제대로 양을 쳤을 리가 없습니다. 성경대로 그저 형들의 잘못을 감시하다가 야곱에게 일러바치는 일을 했겠죠. 물론 요셉은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아들입니다. 늦게 얻은 아들이기도 하고 또 가장 사랑하는 라헬이 낳아준 아들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 정이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맏아들도 아닌 요셉을 그런 식으로 드러나게 편애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다는 것은 야곱이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지나치게 집착하는 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야곱은 그의 아내가 많은만큼 굉장히 처신을 잘 해야만 했습니다. 최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그들을 공평하게 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집 안에 생겨날 수 있는 갈등과 분열을 최소화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는 아얘 대놓고 차별을 했고 나서서 공정함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그 결과입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성경은 벌써부터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형평을 깨뜨리고 요셉에게만 집착하고 오히려 다른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그런 비극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디서나 적용해야 할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집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줍니다. 무엇에 대한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집착의 대상이 되면 바로 그 집착 때문에 집착하는 사람도, 집착의 대상이 되는 것도 모두 망가뜨려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일들과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집착이 되어질 때, 그 자녀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나중에 그 자녀가 살아갈 세상에도 부정적인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권력이란 아주 좋은 섬김의 도구이지만 또 이 권력에 집착하게 되면 권력은 가장 잔인하고 악한 폭력으로 변해버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집착의 대상이 되기 이전까지만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까지 가정과 세상을 망가뜨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선하지 않은 것들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래서 선한 것들까지도 조금은 거리를 두고 상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집착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이 또다른 악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우리는 중간주자들입니다. 우리의 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사람들이죠. 이것은 우리가 한 쪽에서는 추수자들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의 역할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전 세대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맺힌 열매를 거두며 살아가고 있듯이 내 뒤에 오는 세대 또한 내가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들을 거두며 살아가고 또 그들 또한 씨 뿌리는 사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며, 좋은 씨앗을 골라서 잘 뿌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끝까지 선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의 가정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은 평안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항상 나 자신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조금은 거리를 떼어놓고 바라보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중간주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중에는 집착해도 좋을 만큼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항상 쏠리고 기우는 마음을 잘 절제하셔서 선한 것을 선하게 사용하고 간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