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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4.02.23. 주일오후 - 사데교회에 보내는 편지(2)



11. 계0301to06 -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1).pdf


20140223SE (#0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6절



제 이름은 장유진입니다. 어떻게 여러분 보시기에 제 이름이 저라는 사람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까? 이름은 좋은데 사람은 영~ 인가요? 아니면 이름보다 사람이 더 괜찮나요? 제 이름이 꼭 여자이름 같아서 어렸을 때에는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래서 이 이름에 대해서 불만도 많았지만, 철이 들면서는 제 이름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장유진! 부르기도 부드럽지만 뜻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장 자는 베풀 장자입니다. 유자는 넉넉할 유자입니다. 진자는 이름에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수레 진자입니다. 합쳐서 뜻을 생각해 보면, 베풀 것이 넉넉한 수레가 됩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저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담고 여기 저기 넉넉하게 나누어주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저는 여기 저기 붙어있는 교회간판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름들은 처음 교회를 설립한 목회자나 성도들이 지은 이름일 것이고 정말 부르기도 좋고, 또 그 당시 성도들의 소망을 담아서 지은 이름일 것입니다, 아주 좋은 이름이죠.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러는 그 아름다운 이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뜻이 너무 좋기만한 교회들의 이름을 볼 때면 내심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평강교회라는 이름을 보면, ‘저 교회 정말 이름대로 평강한가? 나중에라도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는 말아야 할텐데’라고 걱정이 되고,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교회를 보면, ‘정말 끝까지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텐데.’라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참 우스운 걱정같지 않은 걱정이지만 그런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실제로 이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런 교회들이 많으니까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에는 소망과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치고 자식의 이름을 함부로 짓는 부모는 없고 교회의 이름을 지으면서 되는 대로 마구잡이로 정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생전체를 보여주며, 그 속에 그 사람을 향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포함한 구약의 인물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그 사람의 인생전체를 보여주며, 그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데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교회의 이름을 문제삼고 계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의 이름은 ‘살아있다’ 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그 당시 사데라는 도시 자체가 그랬듯이 활기차고 또 하는 일도 많고 그런 교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데교회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 그 활기찬 교회? 그 살아있는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교회 성도들고 그렇게 생각했구요.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죽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 점에서 사데 교회는 요한계시록 2, 3장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 중에서 주님으로부터 가장 심각한 진단을 받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어느 교회건 주님으로부터 “이미 죽었다”는 사망진단을 받은 교회가 없는데, 사데 교회는 지금 주님으로부터 “죽었다”는 진단을 받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데 교회는 왜 주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요? 왜 주님은 다른 사람들은 다 살아있다고 칭찬해 주었던 교회를 향해 ‘아니다 네 이름은 죽었다’라고 하셨을까요? 


우리 말 성경으로는 편지를 보내시는 주님 자신에 대한 소개가 끝난 후 주님이 사데 교회의 죽음부터 선언하시는 내용이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대뜸 ‘내가 네 행위를 안다’는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그것은 그 교회가 아주 활기차게 움직이며 여러가지 일을 하는 그런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교회를 향해 “너는 죽었다”라고 죽음을 선언하시기 전에 그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너희가 한 일들을 다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칭찬일 리는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는데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해 놓고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 대뜸 “나는 내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정말 뜨끔하겠죠. 주님은 지금 사데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활기찬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랬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런 일들이 사데교회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교회나 성도의 겉모습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는 진짜 모습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죽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이 어떤 교회, 그리고 어떤 성도를 향해 이런 평가를 내리신다면 그것은 굉장히 심각한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평가는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 그래서 절대로 틀릴 수가 없는 교회의 주인되시는 주님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눈에 대해서 누누히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이시며,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우리를 보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신앙은,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모습은 내가 좋다고 해서,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다 괜찮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눈으로 냉정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사데교회는 일을 했던 교회입니다. 활발하게 움직였던 교회입니다. 그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죠. 겉으로도 죽은 것 같은 교회보다는 훨씬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 안에서 주님이 반드시 보셔야 할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그 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무엇이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일을 죽은 일, 그리고 온전치 못한 일로 만들었을까요? 그 해답은 3절이 알려 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사실 여기서도 도데체 이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가 정확하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그것을 다시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일단 이 교회의 문제가 이것을 잊어버렸고 그래서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와 이 교회의 성도들은 도대체 무엇을 잊고 그래서 무엇을 지키는데 실패한 것일까요? 성경이 받고 듣는다고 말하는 것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사데 교회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후에는 들은 대로의 복음, 받은 대로의 복음을 잊고 말았습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과연 그것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과 지키는 일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왜 그 소중한 복음을 잊게 될까요? 사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성도가 복음을 잊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실제로 제가 보이에 오늘날의 교회들 중의 상당수가 이미 복음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성도들도 그렇다는 것이죠. 몇 년 전에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은 그 교회 청년부의 성경공부 리더였는데요. 그 분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성경공부 시간에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요. 그래도 꽤 오랫동안 열심히 교회생활한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복음이고 뭐고 관심이 없다고요. 자기는 그냥 예수 믿고 위로 받으면 되니까 복잡하게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구요. 정말 큰일입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사실 한국 교회 안에는 정작 복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꽤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몇 년 동안 십자가에 대해서는 설교 한 번 하지 않아도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러면서도 조금 설교가 길어지고 또 복잡해 지면 설교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설교는 짧은 게 은혜라는 말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성도들이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오해하고 있을까요? 복음은 처음에 예수 믿고 구원얻을 때나 필요한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한 번 듣고서 아멘하면 그 다음에는 들을 필요도 없고 다시 떠올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복음이야기를 하면 또 다 아는 이야기한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듣고 듣고 또 들어야 할 신앙의 기둥과 생명이 되는, 아니 신앙의 전부가 되는 그런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앞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왜 자신이 로마서라는 편지를 로마 교회에 보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거기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왜 로마 교회에 로마서를 보냈다고 말합니까?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예수 믿는 ‘너희’입니다. 예수 믿은 지 이미 한참 지난 교회 안의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서라는 위대한 서신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안 믿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꾸 복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고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고방식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에 가깝습니다. 물론 오해되고 곡해된 율법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이 율법이 복음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그 메세지만 보면 “모든 것이 은혜다. 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되지만,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그 은혜에 의지해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그저 순종하며 살아라”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반대죠. 율법은 ‘내가 하는 법칙입니다.’ 은혜도 내 힘으로 얻구요. 복도 내 힘으로 받습니다. 내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매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내가 없어지는 법칙이지만 율법은 내가 사는 법칙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살면 나에게 내세울 것이 생기고 내가 답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면 복음은 사라지고 율법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당시 생겨난지 얼마되지 않은 교회들에게 거듭해서 십자가를 이야기 해주고 복음의 은혜를 말해주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사데 교회가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활발한 행위는 있었지만 주님은 그 안에서 그 행위를 온전케 하는 알맹이를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 주님이 온전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런 행위가 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행위는 그것이 복음에 대한 반응일 때만 하나님께 가치가 있습니다.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생겨나는 것일 때,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일 때, 그 때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이 온전하다고 평가하시는 그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서 ‘생각하라’고, 정확하게 번역하면 ‘기억하라’고 하셨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잊지 않도록 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잊는 것이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해야할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복음을 잊는 것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복음을 잊은 사람일까요? 일단은 복음의 내용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잊은 사람이겠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은혜 가운데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복음을 잊은 사람입니다. 또한 두번째로는 복음의 은혜와 감격을 잃어버려서 복음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생각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잊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아니라 율법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의 내용을 모른다면 우리는 꼭 복음을 다시 듣고 배워야 합니다. 또 복음을 알더라도 그 복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사라져 버렸다면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들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선 꼭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 복음과 그 복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그 복음을 주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도록 복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들었고,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하시고 항상 그것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께 온전하고 살아있다고 칭찬받는 그런 성도들이 되고 또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