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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27. 새벽예배 - 그 후에 유다가(창세기 124)



창3801to30 - 그 후에 유다가(창124).pdf


20140227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8장 1-30절




오늘 우리가 함께 살필 본문은 제가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성경이라는 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 차라리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과정이야 어쨋든 결국에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잠자리를 같이했고 그 며느리에게서 쌍둥이 아들들을 얻게 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전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성경이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자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만, 왜 요셉이 이집트로 잡혀갔고 그래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로 팔려갔다는 이야기 끝에 유다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그것 또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바로 이 곳에 유다의 이런 이야기를 등장시켜야 했던 것일까요? 


첫번째 그것은 지금 성경은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 속에서도 계속해서 무너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하나가 되기가 쉽지 않았던 야곱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의 구성원들은 서로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하나만 특별대우를 하면서 감싸고 돌았습니다. 그 아들은 철부지 안하무인으로 자랐고요. 나머지 아들들은 그런 동생을 미워했고 또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 첫번째 결과가 바로 그렇게 아버지가 감싸고 돌던 아들이 형제들의 손에 의해 머나먼 나라에 종으로 팔리고 그 아버지는 그 아들들에게 그렇게 감싸고 돌며 편애하던 아들이 죽었다는 거짓말에 속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헤브론의 집을 떠나서 아둘람 지역에 머무는 일을 통해 야곱의 가정은 한 번 더 무너집니다. 당시는 씨족사회였기 때문에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해서 가족 안에 머물러 살았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유다가 결혼도 하지 않고서 집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결혼을 하고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야곱의 가정이 점점 더 심각하게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로 떨어져 나간 유다의 삶 또한 심각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야곱의 가정은 그 당시로 보면 유일하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아래서 살아가던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가정은 이렇게 심각하게 무너져 갔습니다. 어찌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신앙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응답이 모두 필요한 이유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결국 그 은혜도 그 사람에게는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계속 이어지는 사건들이 야곱이 벧엘로 가서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난 이후에 일어난 일들임을 생각해 볼 때, 방향은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섰을지라도 삶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애씀이 없을 때, 그가 비록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렇게 순종하지 못한 부분에서는 언제든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하나님 안에 들어왔으면 확실히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손 안에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진짜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할 수 있고 우리는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다 똑같은 정도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또 다 똑같은 정도로 하나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명목상으로는 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려는 순종의 노력 정도에 따라 누리는 은혜도 또 그 교회가 하나됨의 온전함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가 풍성한 은혜 가운데 참된 하나됨을 누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에 합당한 반응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하고 그 해답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의 삶과 교회 가운데 더 풍성하고 능력 있게 역사 할 수 있습니다. 


37장이 요셉의 이야기였다면 38장은 유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이 두 지파는 특별한 역할을 했던 지파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요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하나의 나라로 양육되는데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나중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윗 이후의 왕들을 배출한 지파의 조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그 두 지파의 조상들에 대한 처음 역사를 들려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성경의 기록은 이 두 지파의 처음에 대해서 그다지 훌륭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는 철부지 안하무인으로 살다가 애굽으로 팔려가고 나머지 하나는 가족들을 버리고 나와서 좌충우돌 전혀 선택받은 사람같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지파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서 며느리를 통해서 지파가 유지되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통한 구속의 역사는 이 두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바로 여기에 창세기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사건 뒤에 전혀 엉뚱해 보이는 유다의 이야기를 놓아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제 멋대로 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자신의 삶도 망가뜨리고 자기 삶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도 엉망으로 망가뜨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이 민족의 구원자가 되게 하시고 유다가 며느리에게서 얻은 그 아들들에게서 이스라엘의 왕들과 메시야가 탄생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두 지파를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3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세상과 사탄의 모든 악을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팔려간 일과 연관된 이야기들 뒤에 유다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실패 이야기가 놓여져 있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성경은 이런 어두운 실패와 타락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고 말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 개인의 선택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 흐름을 거스르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움직여 가시는 역사를 가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온 우주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주님의 다시 오심까지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실망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모양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이 37장의 요셉 이야기, 그리고 38장의 유다 이야기가 큰 틀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정말 정말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는 것 또한 정말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좋은 것들이 나에게도 정말 좋은 것이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하고, 또 하나님의 섭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거룩한 순종을 더함으로써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