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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2.28. 새벽예배 -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창세기 125)


창3801to30 -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창1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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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38장 1-30절(1-11절)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가나안에 자리를 잡은 유다는 그 곳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엘, 오난 그리고 셀라라는 아들 셋을 얻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났고 당연히 때가 되어 결혼을 했습니다. 유다는 큰 아들인 엘의 아내를 데리고 왔습니다. 데리고 왔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엘의 아내인 다말은 가나안 여인이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첫째 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엘이 얼마나 악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엘을 죽여 버리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직접 죽이셨다는 표현을 쓰는 곳은 이 곳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엘이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을 죽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엘이 얼마나 악했는지,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이 직접 그의 목숨을 빼앗으실 만큼 악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직접 빼앗으실 정도가 될까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정말 정말 악하게 살다가 갑자기 죽거나 혹은 사형을 당하면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저 사람 죽어도 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심하게 악한 일을 하면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물론 죽어 마땅해 보이는 죄가 있고 그것보다 훨씬 가벼운 죄들이 있어서 그것에 따라서 형벌의 경중이 결정되지만 원칙적으로 본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죄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모든 죄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실은 우리가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은총 가운데서 무사하게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입니다. 


엘은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풍습으로 이렇게 장남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해서 형의 자식을 낳아주는 의무를 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엘의 첫번째 동생인 오난은 형수인 다말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수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는 했지만 다말이 임신하게 하는 일은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그것은 다말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자기의 아이가 아닌 형의 아이가 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난은 형의 대를 이어주는 일을 그렇게 싫어했을까요? 이것은 유산상속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장자가 되면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를 상속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만약 형제가 셋이면 유산을 넷으로 나누어서 첫째가 두 몫을 가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엘이 죽었기 때문에 오난은 이제 자동적으로 장자가 되었습니다. 동생이라고는 셀라 하나 밖에 없으니 유산 중에서 3분의 2가 자기 몫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형의 아이를 낳으면 자신은 다시 둘째가 되고 그러면 유산은 4분의 1로 줄어듭니다. 오난은 이게 싫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너무 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인 엘처럼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직접 생명을 빼앗으실 정도로 악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록만을 예로 들더라도 오난보다 훨씬 더 악하게 살았는데 오래도록 잘 먹고 잘 산 사람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말입니다. 적어도 오난은 누구를 해치거나 목숨을 빼앗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동생과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일로 오난의 목숨을 거두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난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 직접적인 이유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는 참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당황스러워 해도 또 이해할 수 없어 해도 하나님께서 그 때 그렇게 행동하셨다는 것만큼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풍성한 은혜 가운데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굉장히 무서운 분이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에게도 엄하게 꾸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꾸중의 정도와 시기를 정하시는 기준이 우리들의 상식적인 기준과 맞아 떨어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그저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영적인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난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은 그가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기심과 욕심, 그리고 이런 것들의 뿌리에 있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어찌 보면 인간의 당연한 본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죄의 근본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장성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긴장 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죄들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항상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싫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도 그 사람의 삶이 그저 평안하고 번영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친 자녀가 아니며, 만약 자녀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징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용서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 은혜를 놓치지 말고 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은혜만 생각하느라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잊지는 마십시오. 평안할 때에라도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마시고 나 자신의 삶과 행동을 면밀하게 살피시면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과 싸우시며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의 싸움을 싸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를 이길 수 있으며, 우리 삶을 가득 채우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은혜와 긴장이라는 신앙의 두 기둥을 붙드셔서 죄와 싸워 이기는 동시에 평안함 넘치는 자녀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