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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3.02. 주일오전 -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마가복음 65)



막1412to21 - 무교절의 첫 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2(마가6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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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12-21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잘 차려진 유월절 식탁에 함께 앉았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자들은 다시 한 번 놀라고 감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풍성한 유월절 식탁이 어떻게 해서 자기들의 눈 앞에 있는지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풍성한 식탁을 마주 대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선발된 두 사람의 제자들이 마치 연극 대본의 지문과 대사를 따라 연기를 한 것처럼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들 모두가 미리 준비된 큰 다락방에서 넉넉한 유월절 만찬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기쁜 명절에, 그런 기적같은 식탁을 대하는 그들이 얼마나 놀랐고 또 흥분되어 있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유월절 식탁을 준비해 주셨던 것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놀라게 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그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식탁을 만들어 내실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그 모든 과정을 하나 하나 가르쳐 주셨고,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유월절 식탁이 되게 하셨던 것은 모든 상황의 실제적인 통제권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또 믿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앞으로도 그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며 일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읽는 우리들이 배우고 또 믿어야 할 것 또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정말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상황의 통제권이 우리들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으며 그래서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며 유월절 식탁같은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며 또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 기적의 식탁에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앉았습니다. 최고의 명절에 기적의 식탁을 눈 앞에 놓고 있으니 그 자리가 은혜와 기쁨, 그리고 풍성함으로 충만한 자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식사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굉장히 갑작스런 말씀이기도 했지만 너무 충격적인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쁘고 풍성한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기도 했구요. 주님의 말씀은 그 좋은 식탁 분위기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말씀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될 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굳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은 전혀 상황과 맞지 않는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 순간이 주님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제자를 돌이키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놓고 그 말씀을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의 하나가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을 팔아넘기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런 가운데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하실 필요가 없는 말씀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자신을 팔 제자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다시 돌이키고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식이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처럼 말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그냥 ‘너희 중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함께 음식을 나눈 사람을 배반한다는 것은 친밀함과 신뢰를 동시에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보다도 극악무도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하심으로써 자신을 팔려는 제자를 향해서 ‘지금 네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너는 그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빨리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그저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대하기 때문에 마치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마음 없이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채로 읽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성경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항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팔 사람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자신을 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제자를 끝까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치 오늘 본문의 ‘너희 중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한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경고와 꾸중의 말씀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읽는 것은 그렇게 즐겁고 반가운 일이 아니죠. 우리는 그런 말씀들을 대할 때 우리의 머리와 느낌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빨리 그런 일들에서 돌이켜서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간절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자녀를 꾸중하시고 또 징계를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듣고 또 거기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느 누구 하나 예수님께 어떻게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고, 그 말씀을 섭섭하게 여겨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예수님께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악하고 또 약한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너희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설교자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것은 설교라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설교가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라는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내려면 성경에 있는 내용을 빼먹지 말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는 은혜로운 말씀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씀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마 성경의 70퍼센트 쯤은 당장 읽어서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들이 아니라 그 반대의 말씀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는 성경을 따라서 사람들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도 설교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만들어 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분명히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풀어서 들려주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어두운 부분에 대한 지적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오후 예배 설교를 마쳤는데,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 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죠?” 정말 황당했습니다. 제가 그 분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제가 그 분의 숨겨진 문제를 알겠습니까? 갑자기 그것도 난생 처음 받은 질문이라서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 분의 이야기 덕분에 저는 오히려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그 날의 설교는 과히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될 점을 지적하고 돌이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그 분은 그 이야기를 자기를 공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이야기로 들었고 그래서 단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그 분에게 은혜가 되었고, 저에게 그 은혜를 표현하려고 저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드렸습니다.  “네. 집사님, 그렇게 들으셨다면 정말 잘 들으신 거네요. 앞으로도 꼭 그렇게 들으세요. 저도 감사합니다.”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는 별로 그런 느낌이 강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설교를 들을 때면 때로는 그 설교가 마치 자신을 공격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설교를 기쁘게 듣기가 힘들죠. 그렇지만 만약 그런 감정이 생겨나더라도 그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에 입각한 것이고 올바른 것이라면 청중은 그것은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금은 아프더라도 단 마음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설교자들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정한 사람을 겨냥해서 설교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하게 말씀드려서 그 설교자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설교를 그런 식으로 잘못 사용한 그 사람의 잘못이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일을 짚고 넘어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그 이야기가 틀린다면 버리시고 맞는 이야기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혹시라도 나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혹은 내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는 것같은 내용이 설교를 통해 들려온다면 그 때는 주님께 이렇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에게는 저런 잘못이 없나요? 저런 나쁜 의도가 제 마음 속에는 없나요?”하고 말입니다. 또 해당사항이 전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라도 제자들처럼 겸손하게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으시면서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런 열린 마음과 겸손한 질문을 가지고 들으신다면 설교자가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여러분이 설교 때문에 시험에 들고 낙심하는 일은 피할 수가 있을 것이고 설혹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더라도 여러분은 말씀으로 인한 유익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정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여기서 그릇이란 빵에 찍어 먹는 과일식초를 담은 그릇을 말하는데 이 그릇은 서너 사람에 하나씩 배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신을 배반할 사람을 바로 자기 곁에서 음식을 먹을 너서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팔려고 마음 먹은 그 제자, 지금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그 제자 또한 다른 제자들처럼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자의 질문 속에서 뉘우치는 마음이나 진심을 읽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그 제자에게는 “난 정확하게 알고 있다. 바로 너다.”라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제자는 그런 충격적인 지적에도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듭해서 무언가 똑같은 것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에 대한 말씀일 수도 있고, 또 더 온전해 지라는 요구일 수도 있고, 특별한 일을 하라는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 그렇게 반복되는 말씀들이 주는 부담은 점점 강해지고 무거워지게 마련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반복되는 경험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기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언제나 항상 무한정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가던 곳으로 계속 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관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주님의 요구와 요청을 계속해서 거부하면 나중에는 그 요구 자체가 싫어지고 그 요청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미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고 싶어지는 영적인 관성은 더 커지고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거기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 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요구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그래도 아직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여겨질 때, 그 때 그 요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요구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 전에 자기 생각과 고집을 꺾고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상하게도 계속 반복되는 깨달음이 있거나 혹은 “이제는 이렇게 해야 하겠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있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마시고 꼭 그 생각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위한 선하고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정말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아마 주님도 이런 말씀까지는 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슬프셨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이 마지막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이런 안타까운 마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선택에 대한 아주 중요한 진리도 들어 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장 가까운 사람, ‘한 그릇에 손을 넣고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하신 대로 당국자들의 손에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이 이미 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앞으로 걸어갈 길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을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걸어가는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도, 그리고 죽음도 모두 주님이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건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고 주님은 거기 순종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행동이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쓰임을 받는다면 과연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행동을 정죄하실 수 있을까요? 


사람들 중에서는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와 빌라도,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고 쓰임 받은 도구니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악역을 감당해야만 한다면 악역은 세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악역을 정하신 것도 아니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악역을 감당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악역이 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그 악역을 담당하는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악역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그 일을 맡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 제자에게 나를 팔아 넘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힘들겠지만 네가 그 일을 꼭 맡아주어야 하겠다고 부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끝까지 그 제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시면서도 계속해서 그 제자를 설득하고 또 설득하셨습니다. 그가 그 길을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분위기까지 망쳐가면서 그 제자 한 사람만을 생각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이 준비되고 또 만찬이 시작되기 전의 일들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통제권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유월절 만찬 준비가 한 단계 한 단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까지도 하나님께서 아시는 대로,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이 세상의 일들 뿐만 아니라 자기 운명 또한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에 유혹을 받고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유혹에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한 통제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수가 있고 그만큼 우리를 유혹하는 죄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왜 그 제자가 끝까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주님을 팔아넘기게 되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돈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을까요? 물론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가 받기를 원했던 돈보다도 가치가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유월절 만찬이 준비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모든 현실의 통제권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정말로 믿었다면, 처음에는 돈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아먹을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더라도 나중에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자기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누가 자신을 팔아 넘길지 끝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을 따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이 끝까지 그 제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마치 경찰이 범죄자를 포위하고 확성기를 통해 마지막 자수할 기회를 주는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그렇게 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제자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심지어는 나중에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할 우리들과 같은 성도들까지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고, 또 그것을 막아 주시고 싶어하시는 간절한 소원이 있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성경이라는 책은 단순히 그 때 있었던 일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후에 예수를 믿게 될 성도들 안에서 참된 신앙을 방해하고 실패하게 하는 악한 것들을 몰아 내려는 목적으로도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될 가능성과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던 열 둘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절대로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을 수 있는 낮은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옳은 것을 요구하시고 잘못된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면 내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순종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여기에 반드시 더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위에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일들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유혹은 거의 항상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나의 영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내가 먹고 사는 일을 포함한 생생한 현실의 주인이고 주관자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그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의 실질적인 주인이시고 또 주관자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고 또 그 믿음을 고백하시며 그 믿음에 따라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세세한 부분에서는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항상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며, 거기 더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항상 이런 믿음과 겸손함으로 죄악을 넘어 주님 함께 하시는 풍성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듣고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이 이 세상의 모든 현실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심을 믿고 사는 믿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