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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3.06. 새벽예배 - 어찌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세기 128)



창3906to10 - 어찌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128).pdf


20140306D (#01).mp3.zip





본   문 : 창세기 39장 6-10절



하나님께서는 열 두  형제 중에서 유다와 요셉을 하나님의 언약을 담는 그릇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 안에서의 두 사람의 삶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유다는 자기 집 가까운데 자리를 잡고 살았지만 자기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성적인 타락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수치를 당했을 뿐 아니라 집안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끝까지 스스로를 지켜 냈습니다.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자신을 향한 성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을 지켰습니다. 사람이 홀로 있을 때 자신을 지키고 신실하기가 정말 어려운 법인데 요셉은 그 일을 훌륭하게 해 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애굽에 던져진 요셉 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 없고 그 속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지키려고 끙끙대며 힘을 쓰지만 거대한 악의 힘 앞에서 좌절하고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애굽에 홀홀단신 그것도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자기 자신을 지켜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용기를 줍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요셉의 겉모습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전부이지만 우리는 이 짧은 구절만으로도 요셉의 모습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비록 종이었지만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게다가 외모 또한 비할 바 없이 훌륭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남성으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여느 타락한 나라의 귀족부인이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는 그런 요셉에게 끌려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유혹이지 이것은 유혹이라기 보다는 실제로 압력에 가까웠습니다. 사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눈짓으로 시작되었지만 요셉이 그것을 모른 채 하자 보디발의 아내는 아얘 대놓고 노골적으로 요셉에게 잠자리를 요구합니다. 10절을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날이면 날마다 집요하게 유혹하고 강압적으로 요구했는데도 그가 그것을 모두 뿌리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우리에게 우리의 연약함을 핑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또 우리에게도 소망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는 죄라는 것이 우리가 싸우는 방법만 알고 또 싸우려고 하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셉은 여주인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 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우선 우리는 이 말 속에서 그가 주인이 자신에게 보여준 신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맡기고 또 얼마나 커다란 신뢰를 주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일단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의 신뢰를 배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범죄를 막는 첫번째 방패가 되어 주었습니다. 죄라는 것이 완전히 개인적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저질러 지는 것들이고 그럴 때는 그것이 사람들의 신뢰를 깨뜨리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자신과 여주인 사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일이기 이전에 자신과 보디발 사이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믿음과 유익보다 나 자신의 유익을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쉽게 유혹에 넘어가고 죄와 타협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나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많은 죄의 유혹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은 자기에게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는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 거의 무제한 주어져 있지만 주인의 아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여주인에게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실 우리에게 금지된 선 밖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지만 아담은 그 금지된 영역 밖으로 넘어갔고 그것이 바로 그의 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유혹을 유혹에 머물게 하려면 과연 나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이고 또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또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을 지켜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는 비교적 지켜야 할 선을 잘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맡겨진 것이 많아지고 그래서 힘이 생기게 되면 자꾸 자기가 지켜야 할 선 밖으로 넘어갑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교회를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작고 부족한 교회일 일 때는 성도들이 겸손하고 순수하다가 교회가 커지면 자꾸 변합니다. 겸손함과 순수함이 퇴색되고 교회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힘을 과시하는 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어집니다. 그렇게 지켜야 할 선을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지켜야 할 선을 제대로 인식하고 또 그 선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 안에서나 본받고 연습해야 할 모습인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 무엇보다도 요셉은 죄란 결국 하나님께 저지르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집요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주인의 신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라면 자신에 대한 주인의 신뢰 이야기를 했으면 그래서 나는 주인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 앞에서 누구를 위해서 일하든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충성되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충성된 것이고 우리가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불의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둘째로 실제의 삶 속에서는 사람에게 대한 태도와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또 하나님을 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상전을 대할 때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불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부정직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저지르는 모든 죄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저지르는 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두 가지가 분리될 때, 우리는 사람 앞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일에도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사는 일에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 조금 부수적인 것이지만 꼭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거듭해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지만 실제로 그것 자체가 나 자신에 대한 공식선언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는 데도 많이 유익합니다. 


네번째로 10절을 보면 요셉은 그 여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그 여주인과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조금은 소극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막상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고 하면 100퍼센트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유혹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혹이 환경과 합해지면 몇 배나 강해집니다. 그러면 떨쳐 버리기가 정말 어려워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는 그 모양이라도 취하지 말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이런 저런 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유혹 자체를 모두 없앨 수는 없기 때문에,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사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람에게 죄를 짓고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이고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또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각인시켜서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유혹은 누구에게나 강력하니까요. 


항상 죄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람 앞에서의 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임을 잊지 마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서도 죄와 싸워 이기는 거룩한 길 가는 백성들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