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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3.09. 주일오전 - 그들이 먹을 때에(마가복음 66)



막1422to26 - 그들이 먹을 때에(마가6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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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22-26절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만찬은 유월절의 첫날 저녁에 이루어 지는데, 이것은 단순한 식사나 파티가 아니라 유월절이 유월절 되게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날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한 모든 상징과 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라는 절기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유월’이라는 말은 그저 ‘지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절기는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자신들을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은 무엇이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날일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집트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은 정말 무시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영토 내의 모든 가정의 모든 맏아들들을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에는 이집트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심지어는 짐승의 맏이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장자란 곧 복과 미래를 의미하였던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일은 미래와 그 미래에 주어질 복이 한꺼번에 끝장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형벌이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이 죽음의 형벌에서 이스라엘을 면제시켜 주셨습니다. 일년된 숫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기만 하면 죽음의 사자들이 그 집은 그냥 지나쳐 가도록 해 주셨고, 유월절은 바로 이렇게 죽음이 지나쳐 간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유월절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재앙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소 이집트에서 풀려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생명과 구원, 그리고 해방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축제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이 유월절의 만찬은 한 가정의 가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정해진 절차가 있고 그 절차에 따라서 행해졌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포도주 잔을 네 번 드는 일을 중심을 이루어지는데 잔을 한번 씩 들 때마다 차례로 행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은 먼저 첫번째 잔을 들고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날인 유월절을 지키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두번째 잔을 든 후에는 자녀들에게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와 세번째 잔 중간에 누룩 없는 떡과 양고기를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세번째 잔을 든 후에는 죽음의 사자로 부터 자신들을 구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 잔을 들고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순서를 머리에 그리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이 그 당시 유월절 만찬의 순서를 따라서 이루어 졌고, 그래서 이 말씀을 그런 차례에 따라서 살필 때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떡을 떼어 나눠주는 장면부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보면 본문의 말씀은 그 날 다락방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떡과 잔에 대해서 주신 주님의 중요한 두 말씀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기록된 것 같습니다. 원래 유월절 만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떡과 잔이었으니까요. 원래 가장들은 떡을 나눠주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데, 예수님께서는 떡을 들고서 감사를 드리는 대신에 그 떡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떡이 제자들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기를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떡을 찢어서 나눠 주셨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의 무교병을 자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 첫번 유월절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그 무교병이 바로 자신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몸이신 떡을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손수 찢어서 나눠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첫 번 유월절 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마리의 양이 목숨을 잃고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양이 자신의 살을 찢겨 희생당하지 않고는 이스라엘이 유월절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찢어서 나눠주신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예수님 자신의 희생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또한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생명이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떡을 나눠주신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잔을 드시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는 그 잔을 옆으로 전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은 분명히 보통의 유월절 식사에서 가장이 세 번째 잔을 들고서 행하는 절차였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때 가장들은 옛날을 기억하면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게 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그것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세 번째 잔을 주시면서 거기 담긴 포도주가 자신이 흘리게 될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옛날 이집트에서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설주에 몸이 찢겨 죽은 양의 피가 발라져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피가 바로 자신의 피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제도 제자들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어 그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이 쉽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서 찢겨 죽으시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흘려주신 그 생명이 우리에게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문설주에 발려졌던 양의 피가 죽음의 사자를 지나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죽음이 우리 안에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이 되었고,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새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런 은혜 덕분에 구원을 얻었고 새 생명을 가지게 되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있는 새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생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몸을 주시고 또 생명을 흘려 보내셔서 우리에게 주신 정말 귀하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피를 그냥 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요한 언약을 맺을 때마다 항상 제사가 드려지고 그 제물의 피가 백성들에게 뿌려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뿌려진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맺어지려면 항상 피가 필요했습니다. 죄 없는 제물의 피가 그들에게 뿌려져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 때, 비로소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 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만 지키면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번히 그 언약을 배반하고 깨뜨렸습니다. 그 일로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를 정도의 징계도 받았고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 그들과 또 다시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언약이 바로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에 나오는 언약인데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니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언약은 그 이전에 세워졌던 언약들과는 전혀 다른 언약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언약들은 번번히 실패했기 때문에 똑같은 언약으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예전의 언약들처럼 하나님의 법을 율법이나 십계명처럼 사람 바깥에 두지 않고 마치 돌에다 글을 새기듯이 그 백성들의 마음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으로 탄생하게 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바깥에서 주어진 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소원이 되고 그들 자신의 뜻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진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 백성들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아얘 기억하지 않으실 정도로 그렇게 용서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언약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기 기록되어 있는 모든 일들 중에서 사람 쪽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 언약을 주시고 이루시는 모든 일들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들을 일컬어서 그냥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고 즐겁게 헌신하며 순종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변화시켜서 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약속을 이루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백성이 되게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가 바로 이 언약을 홀로 완성하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피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고 또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하고 또 기꺼이 순종하려고 하는 것은 다 주님이 흘리신 언약의 피 덕분입니다.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날의 유월절 만찬은 단순한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이 세워지는 자리였습니다.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열 두 명의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는 자리, 아니 그들에게 스스로 세우시고 또 이루실 언약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 또한 전통적으로 유월절 만찬에 포함되어 있는 절차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가장들은 마지막으로 네번째 잔을 들고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을 찬양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 또한 이 찬양을 함께 불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찬양은 구원의 노래, 죄 용서의 노래, 자신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음을 찬양하는 노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6절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 대해서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유월절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해방을 찬양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풀어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그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을 찬양했는데 그 찬양이 해마다 수천년 동안 반복해서 불리워지고 또 불리워졌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노래한 것은 최종적인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에서 풀려나 빼앗긴 들에서 다시 봄을 맞이했듯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풀려나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 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수천년 동안 같은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 일에 대한 그들의 감사와 감격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과 자유는 이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어마 어마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고, 죄악으로 부터 자유를 얻었으며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까요? 우리의 영혼은 무엇을 가장 기뻐하고 또 즐거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장 감격하며 또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찬양은 이런 것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작은 복들이나 위로를 더 많이 노래하고 더 크게 노래합니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이런 은혜들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받을 때,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짜 은혜, 정말 놀라운 은혜에 따라 오는 부록입니다. 그게 기도의 응답이든, 함께 하시는 것이든, 그리고 병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든, 혹은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이든 그 모든 것들은 다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입니다. 


저희 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요. 제가 생각해도 참 유치한 일이지만 가끔은 이 놈 때문에 기분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이 놈이 얼마나 먹성이 좋은지 먹을 것만 보면 정말 환장을 합니다. 가족 중에서는 제가 뭘 제일 잘 주는 편이어서 그런지 제가 뭘 먹을 때면 꼭 제 앞에 와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정말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절실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 봅니다. 때로는 너무 먹고 싶어서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부담스러워서 먹던 것을 조금 떼어서 입에 넣어주면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그렇게 주다가 제 손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홱 돌아서서 자기 자리로 가 버립니다. 그때부터는요 불러도 쳐다 보지도 않습니다. 뭐 당연한 것이지만 그 놈의 관심은 제가 아니라 그저 먹는 것이었던 것이죠.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도 먹는 것 때문이었고요. 그렇게 돌아서 갈 때면 정말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과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의 신앙은 꼭 이런 모양이 되기 쉽습니다. 목이 말라 샘을 찾지만 목을 축이고 나면 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물 생각만 하는 그런 신앙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신앙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샘이 내가 필요한 물을 줄 때는 그 샘을 생각하지만 그 샘이 내가 필요로 하는 물을 주지 않으면 그 샘을 아얘 잊고 그 동안 그 샘 때문에 목을 축일 수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다 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고서, 거기서 흘러 나오는 축복들만을 사랑하고 노래한다면 우리 신앙은 이런 모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몸을 찟고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에게 주어진 그 값진 구원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제적인 복들은 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덧붙여 지는 복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실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복이구나. 아! 이것이 바로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노래의 주제를 바꿔야 합니다. ‘이런 저런 것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이런 저런 것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런 복된 구원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있든 없든,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든 그렇지 않든 흔들리지 않고 감사와 감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샘이 물을 내지 않아도 샘은 항상 있고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유월절 만찬은 기쁜 파티인 동시에 십자가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열 두 제자들, 그리고 그들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탄생시키는 은혜로운 언약의 자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렇게 예수님께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선물로 주신 새 생명으로 사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감람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기쁨의 자리,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악한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제자가 있었습니다. 나머지 열 한 명도 그다지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또한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 근심하며 자신은 아니냐고 불안한 질문을 했고, 뒤에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대로 그들 또한 다 주님을 버릴 것이고 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가,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이 다 그렇게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새로 탄생할 하늘나라 백성들의 대표로 삼으셨고 또 그들을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언약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그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 잔치를 벌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살을 찢고 목숨을 내어놓아 흘려주실 그 보혈의 능력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제물된 양의 피가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다시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키고 또 회복시켰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흘리실 그 귀중한 보혈이 그 악하고 두려움 많고 또 자기 밖에 모르는 제자들을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실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되어진 사람들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 같은 우리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여 항상 주님을 배반하며, 또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런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그 귀한 피를 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 보혈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리고 항상 보혈의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의지해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 새로운 언약백성으로 만들어져 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당신의 십자가를 축복했고 감사했고 또 노래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배신의 유월절을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유월절로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유월절은 십자가의 절기이고 어린 양의 절기입니다. 연약하고 죄많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 주신 절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 유월절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의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위에서 찢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 되었으며, 그 위에서 흘려주신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참 음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의 겸손의 이유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살과 피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 교만해 질 때도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반복되는 죄 때문에 절망할 때도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그 유월절 식탁으로 나아가 찢어주시는 그 분의 살을 다시 받아먹고, 부어 주시는 그 분의 피를 또다시 받아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는 그 은혜와 새 생명에 힘입어 다시 회복의 노래, 구원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를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죄와 싸워 승리하며 날마다 더 거룩해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붙들기를 소망합니다. 


어제 설교준비를 마무리 하는데 갑자기 아주 은혜로운 유월절 찬양이 생각 났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부르라고, 부르면서 고백하고 선포하라고 주신 노래인 것 같습니다. 많이 부르던 찬양이 아니어서 먼저 한 번 함께 들어보고 나서 그 다음에 함께 부르겠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내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살과 흘려주신 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내가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찬양하게 하소서.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속에 계셔서 나의 참된 양식과 음료가 되어주시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매일 매일이 나의 유월절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