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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3.14.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에스겔 15-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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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3월 14일 월요일




처음에 정말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성도들은 그 은혜에 정말 감사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깨닫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게 계속 그러면 좋은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런 은혜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당연해지고 그러면 그런 마음이 흐려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이 정도에서만 머물면 그래도 다행인데 많은 경우 여기서 더 갑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감사와 감격, 그리고 겸손은 사라지고 자신이 그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 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고 또 자신이 그런 것을 받을만 해서 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만해 지기 시작합니다. 아닐 것 같지만 대부분 많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데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 또한 이방인들과 똑같이 그들과 섞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서 부르시고 거기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동원한 것이 바로 포도나무 가지라는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포도나무이신 하나님의 ‘가지’라는 사실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나무 가지는 다른 나무 가지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그릇도 못도 만들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뗄깜으로도 제대로 사용될 수 없을 그런 상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포도나무 가지의 있는 그대로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치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포도 나무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정말 쓸모 없고 값어치 없는 것이 되고 마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을 값어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비유가 나면서 광야에 버림받아 피투성이가 되었던 한 여자 아기의 비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 어린아기를 데려다가 치료해 주고 아름답게 키워낸 어떤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기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고 황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내로 삼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 여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미끼로 삼아 여러 남자들을 유혹하여 그들과 간음을 일삼는 창기가 됩니다. 아니, 창기보다도 못한 여인으로 전락합니다. 창기는 선물을 받고서 몸을 팔지만 이 여인은 자신이 선물을 안겨 주면서 자기 몸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유다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유다백성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다, 어머니는 헷 사람이다, 언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아우는 소돔이다라는 설명을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그 죄악으로 볼 때, 그렇게 이방족속들 중에서도 멸망받아 마땅한 특히 죄를 많이 지은 이방족속들과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유다백성이어야 합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귀한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순결함을 팔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유다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이방족속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그들 중에서 태어나고 그들 중에서 함께 자란 그들과 똑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다른 이방족속들과 똑같이 대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고 겉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유다는 완전히 끝나야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그러나’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은혜로운 단어가 바로 이 ‘그러나’입니다. 끝입니다. 원칙대로만 하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끝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어렷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성도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자신이 맺은 언약을 잊고 또 버려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언약이 깨지면, 똑같은 언약을 다시 맺고 또 다시 맺으십니다. 그리고 그 새 언약 속에서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은 정말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지만 결코 바람직하거나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성도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롭게 경험해야 합니다. 정말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중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중에 영광스럽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시고 회복시키는 은혜, 그래도 여전히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가 우리를 더 감사하게 하고 감격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혜는 될 수 있는대로 덜 받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고 놀라운 은혜를 기쁨 가운데, 즐겁게 받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귀함이 어디에서 온 줄을 잊지 말고서 부르신 부름에 따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