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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3.16. 주일오전 - 시험에 들지 않도록(마가복음 67)



막1427to43 - 시험에 들지 않도록(마가67).pdf


20140316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27-42절


저는 한 때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단하고 그 결단한 것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초나 혹은 교회 부흥회, 그리고 수련회 때만 되면 “주님,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부터는 꼭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결단의 기도를 드렸고 맹랑하게도 스스로 그 결단을 더 흔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주님의 자녀가 아닙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일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상하기는 하지만 얼마나 어리석고 철없는 행동이었는지 스스로도 부끄러워질 지경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는 항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단을 하고 그 결단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참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결단대로 행할 능력이 없을 때는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결단하고 또 결단하였지만 사실 제가 하겠다는 것을 하겠다고 한 만큼 행했던 적은 제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겠다고 결단하고는 며칠 가지 않아서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매일 새벽예배에 나가겠다고 결단의 기도를 드려 놓고는 한 주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그런 좌절감과 자책을 피해보려고 아얘 결단을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언가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이제부터는 이렇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서는 조금씩 노력하면서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겸손하게 기도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단을 했을 때보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같은 일을 더 꾸준하게 그리고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의지가 남달리 약했기 때문에 결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면 좌절하는 이런 경험이 훨씬 더 많았겠지만 아마 우리 성도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실패하고 또 결단하고 실패하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자신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생겨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강조를 두신 곳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는 앞부분이 아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는 뒷부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이런 뜻이 됩니다. “너희들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듯이 나머지 모두는 내가 붙들리고 또 죽게 되면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한 가지만 기억해라. 나는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로 먼저 가서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 때문에 흩어지더라도 이 약속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와라. 그러면 된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실 것이고 먼저 갈릴리에 가서 기다리실 것이니 그것을 기억하고 그리로 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때로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악함 때문에 스스로도 실망하고 낙심하게 될 때,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걱정마라. 아직 끝이 아니다. 내가 있다. 여전히 살아있는 내가 있다. 내가 앞서가고 있으니 나를 따라 오거라. 너는 나만 보면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이나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될 때, 그 때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실패한 나 자신이나 혹은 내가 저지른 실패가 아닙니다. 그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앞서서 나를 인도해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 언제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일어서서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귀에는 뒤쪽의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발끈했습니다. 열 두 명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는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으면서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그 말씀을 극구부인하고 나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라는 말씀으로 모든 제자들을 배신자로 규정하셨기 때문이었겠지요. 먼저 베드로, 별명은 반석이지만 아직은 가볍기만한 속빈 바위인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예수님 편에서 장담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증하건데 너는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우리 같으면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그러냐 하고 넘어 갔을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꼭 꼬집어서 “너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네가 상태가 가장 심각한데? 넌 밤이 새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 또한 베드로를 책망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자신 넘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실패하게 되기 쉽기 때문에 베드로를 겸손하게 하시고 또 그런 순간을 대비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더 힘을 주어서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들 제자들도 자신들의 충성심이 의심 받을 새라 베드로와 똑같은 말을 하면서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에 도착한 예수님께서는 먼저, 많은 제자들을 동산 입구에 남겨 놓으시면서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동산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동행했던 세 사람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그리고는 돌 던지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몸부림 치며 정말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런 당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드리시는 한 시간을 참지 못하고 세 사람은 모두 잠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요. 이들이 이렇게 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도의 장소에 도착하자 마자 굉장히 놀라고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감정이 안정되질 않고 널뛰듯이 불안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이러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슬퍼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드려야 할 내용이, 그리고 그 이후에 순종해야 할 일이 예수님께는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그 세 사람에게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주님은 그 당시 마음의 고민 때문에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이 되셨고 그것 또한 있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멀리 가셔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은 소리로 기도드리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정말 돌 던지면 닿을 곳에서 큰 소리로 절규하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정말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 모두 나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제자들은 꼭 자리를 지키고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특별한 부탁과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말씀, 평상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 그리고 몸부림치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들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 뿐만이 아니라 주님이 깨워놓고 가면 또 잠들고, 또 잠들고… 세번씩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살피면서 거듭 거듭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과 진짜 나 자신의 모습이 일치될 때보다는 그렇지 않을 때가 휠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나의 진짜 모습이 내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자기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없을 거라고, 죽어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였을 때, 그들의 이야기가 거짓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진심 중의 진심이었습니다. 그 때 그 말 속에는 전혀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몇 시간이 되지 않아서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괴로움이나 고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이들의 모습일까요? 비록 그들의 이야기 속에 거짓이 들어있지는 않았을지라도 충성을 장담하는 그들이 아니라 그렇게 잠들어 버리는 그들이, 진짜 그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제자들이 주님이 잡혀 가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질 않습니다. 하려고만 든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애쓰고 노력해도 좀처럼 해 내기가 어려운 일은 더욱 더 하기 힘든 법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한 시간의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일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과 진짜 우리 자신은 사실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상적이가 쉽지만 우리의 존재와 성품은 결코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과 가치 중심적이기 보다는 욕구 중심적인 행동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부터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게 하고 스스로에게 좌절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우리의 연약함과 그 연약함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악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행동을 보고 당연한 행동이라고 합리화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은 졸음을 참기 어려워 하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어서는 안되었고 깨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또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서는 안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함이 만들어 내는 악한 일들을 피해야 하며 또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풀기 힘든 문제, 어찌보면 우리 힘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연약함과 죄 사이에 존재하는 이 끊기 힘든 고리를 끊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그것이 결단하고 또 결단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한 방법이고 우리도 살면서 번번히 실패한 방법이니까요. 


우리는 그 방법을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너무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셨습니다. 그렇게 흔들림 없던 분의 감정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널을 뛸 정도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음 주일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고민과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을 정도로 싫어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결심을 하고 결단을 내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괜챦을거다, 다 잘 될 거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세번씩 하나님 앞에서 정말 말 그대로 사생결단하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는 예수님도 극복해야 할 연약함을 지닌 인간이셨으며, 그러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나약함을 이기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기도하는 곳까지 가셨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상태를 그대로 드러내 말씀하셨고, 또 제자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도드리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절대로 잠들지 말고 깨어서 지켜 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 자기 자신을 본보기로 해서 제자들에게 극복하기 힘든 인간적인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힘든 상황을 교실로 삼으셨고, 그리고 그 속에서 목숨을 걸고 드렸던 그 기도를 제자들을 위한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마지막 수업까지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느라고 듣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첫번째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측은히 여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 굉장히 자주 사용하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향한 마음의 소원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것 또한 우리의 문제이지만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육신이 우리가 가진 몸을 의미하는 것이건 아니면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건 우리의 육신은 항상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로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육체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도 역시 그 몸을 사용하게 되니까요. 인간으로서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하는 이런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몸의 연약함을 가진 우리가 이미 타락해서 죄로 기울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항상 사탄이 넘어뜨리려고 노리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든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에 소원과 의지가 있어도 연약한 육신 때문에 가고자 하는 바른 방향으로 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고 또 인정하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저 그렇게 ‘내가 다 안다. 다 이해한다.’라고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연약함에 대한 해결책까지도 제공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잠들었던 제자들에게 주셨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대해서 취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두 가지 입니다. 첫째로는 깨어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항상 맞물려 돌아갑니다. 깨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먼저일까요? 우리 주님의 말씀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깨어 있는 것이 먼저입니다. 깨어 있어야 더 깨어있게 하는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심방 중인데요. 지난 수요일에 심방을 하다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권사님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병장수가 아니라 일병장수”라고요. 말씀인 즉 질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오래동안 그리고 더 건강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살아가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분들 중에는 평상시에 이런 저런 잔병치레가 많았던 분들 보다는 이상하게도 자기 건강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던, 정말 건강했던 분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현상이 상식이 되는 이유는 스스로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자기 건강과 질병에 대해서 깨어 있지 않고, 그래서 별로 조심하지도 않고 또 몸이 보내오는 신호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약한 사람들보다 하루 아침에 힘든 일을 당하게 되기가 더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이 연약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시험에 넘어져서 커다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깨어있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 조심하고 민감하게 생각하며 그러면서도 항상 그런 연약함이 죄로 이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만한 사람들은 오히려 깨어있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크게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함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고민과 슬픔에 몸부림 치셨으며 그것 때문에 그야 말로 사생결단을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것은 항상 시험에 노출되어서 살아가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그 시험을 스스로 이겨내기 힘든 우리들을 위한 실물교육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연약함 자체는 우리의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그 연약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시험을 이겨낼 정도로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연약함만 탓하고 있죠. 이것은 마치 학생에 비유한다면, 전혀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공부를 못한다고 한탄하는 모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잘 할래야 잘 할 수가 없죠.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이렇게 정말 처절하게 기도하셨다면 그 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연약하고 또 이미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기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연약함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얼마나 더 간구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우리들은 우리 생각만큼 선한 사람들도 아니고 또 강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취약한, 연약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보호하고 또 시험을 이기는 첫번째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우리의 악함과 연약함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이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본능적인 반응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끝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깨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 있는 기도자가 될 수 없으며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그런 말씀들을 거울 삼아 자신의 내면을 자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자존심 상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당연한 모습이며,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켜내고 더욱 더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연약함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또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 부족함이란 이미 부족함이 아닙니다. 그 부족함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이유가 되고, 그러면 그 부족함을 통해서 충만함과 온전함이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이 자신의 연약함을 말씀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분 앞에서 조차 강한 척, 괜챦은 척 하지 마시고 약한 것은 약하다고, 악한 것은 악하다고 정직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이러니 도와 달라고 이러니 붙들어 주셔서 시험에 들지 않게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부족함 때문에 더 온전하며, 연약함 때문에 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처럼 시험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틀에서 기름을 짜듯 땀이 피처럼 흐르도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전부 내어놓고 간절히 기도하셨던 주님의 기도를 배우시고 또 그 능력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고, 깨어 있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시험을 이기는 겸손하고 힘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