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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3.21. 금요기도회 - 그 때에 베드로가(사도행전 54)

행1009to23 - 그 때에 베드로가(사도행전5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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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0장 9-23절




오늘 본문의 중심에는 베드로가 본 환상이 있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베드로가 그 환상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환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때 욥바의 가죽 가공업자인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베드로가 머물러 있었던 욥바는 성경적으로 볼 때는 아주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그것은 그 욥바가 니느웨로 가서 그 곳에 사는 앗수르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그게 싫어서 도망쳐 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서가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요나서가 구약에 속해 있지만 놀랍게도 이방인들을 사랑하시고 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바는 요나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불순종 했던 불순종의 도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욥바에서 그 당시의 유대인의 눈으로 본다면 요나 시대의 니느웨 사람들과 똑같은 위치와 관계에 있었던 로마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베드로를 보내려고 하십니다. 그 동안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의 때가 차리를 기다리셨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이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문을 연 사람이라면 그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환상이었으며, 그렇게 열려진 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고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하늘나라 백성이 된 사람의 대표가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이야기는 단순히 의로운 한 사람의 구원을 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드디어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나팔소리의 가장 큰 주제가 베드로가 보았던 환상 속에 들어 있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던 베드로는 갑자기 배가 고파졌습니다. 아마도 지붕 아래에서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베드로의 시장기가 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환상이 이상하게도 먹는 것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배고픈 베드로를 놓고서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겨져 있는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먹어도 괜찮은 깨끗한 짐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먹으면 절대로 안되는 짐승들도 많았습니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을 두고 진퇴양란이라고 하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바로 그것이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겪으셨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그 배고픔을 채우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베드로처럼 하나님께서도 눈 앞에 하나님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음식이 놓여 있었어도 그 음식을 잡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배고픔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데, 그 이방인들이 그 동안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이 활짝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항상 이런 안타까움 가운데 계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길이 열렸습니다. 그 길이 어떻게 열렸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보혈 덕분이었습니다. 그 보혈이 마치 부정한 음식 같았던 이방인들을 정결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배는 주린 채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본 것은 보자기 같이 네모난 그릇이었습니다. 그릇의 네 귀퉁이는 줄로 매어져 있었고 그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는 부정한 것들 뿐만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들 까지도 함께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 짐승들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부정하게 여겨졌던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정결하게 여겨졌던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릇은 보자기 같은 네모 모양이었을까요?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온 세상을 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네모난 그릇에 담긴 온갖 짐승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덕분에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원래 타락하기 전의 처음 세상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던 그 네모난 그릇과 같은 세상이었죠. 그런데, 아담으로 인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이 세상에는 깨끗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죄인과 의인으로 나뉘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그 사람 자신의 결단과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별이 그 사람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되게 했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구별하시는 은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구별이 완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거룩하고 또 의로운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구별하신 이스라엘에게 지켜야 할 음식법을 주셨습니다.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고 깨끗한 짐승은 식용으로 사용해도 좋지만 부정한 음식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짐승 중에 어떤 짐승은 부정하고 또 어떤 짐승은 깨끗한 짐승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 이미 부정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을텐데 그건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과 깨끗한 짐승을 나누신 것이 마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었지만 그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과 비슷한 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원래부터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신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규정해 주신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어서 였습니다. 첫째,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원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실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법은 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 자체가 기적같은 은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거룩하고 정결한 가운데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둘째,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셔야 거룩해 질 수 있고, 그제서야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정결예식이나 제사제도가 그래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째, 그러니까 항상 자신을 더럽힐 수 있는 것들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이 세가지를 아는 것은 죄인이면서도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해서 의식을 하면서 살아야 그래도 자신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는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그려져 있는 세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네모난 그릇같은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속됨과 깨끗함의 구별이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며 또 그 모두가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 세상, 그것이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 동안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소망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배가 고프셨고 만족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하나됨을 막고 있던 죄와 사탄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벽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는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할 베드로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배가 고플 때, 베드로를 찾아가셨고 그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그릇을 보여주시면서 “잡아 먹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배고픔은 하나님의 배고픔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잡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잡고 또 베드로가 먹을 때 하나님의 배고픔도 해결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베드로에게는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제껏 율법이 정해놓은 부정한 짐승들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동안 자기가 지켜온 것을 깨뜨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미 속된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씻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다 정결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 거룩한 사람들이나 덜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만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나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려면, 다시 한 번 욥바를 불순종의 땅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바로 그러한 편견과 이방인, 특히 로마인들에게 대한 악한 감정을 다스리고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과 상관 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이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베드로를 설득하셨고,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도록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순종하는 요나가 될 수 있었고, 욥바는 순종의 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환상과 이 환상을 통해 일어났던 베드로의 변화는 그 당시로서는 그 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없을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으로 살았던 베드로에게 유대인이기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였으며, 베드로가 그 환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안 그러시면 더 편하실텐데 이상하게도, 그리고 번거롭게도 꼭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그 동안의 자기 생각, 자기 가치관, 심지어는 습관이나 성향, 스타일까지도 완전히 바꾸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유대인됨을 내려놓고서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구원문제 때문에 배가 고프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 땅 위에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뜻들 때문에 여전히 배고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같은 수많은 베드로들을 향해서 ‘집어 먹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린 배를 채워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기가 지켜오던 것들을 계속 지켜나가기를 원하며, 또한 익숙해져 있는대로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대답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여전히 배고프신 상태로 내버려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시기 위해서 이미 베드로와는 비교도 안되는 댓가를 지불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순종, 하늘보좌 대신 말 구유를, 하나님 나라의 영광 대신에 목수의 고단한 삶을 선택하셨던 예수님의 순종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인인 사람들에게로 오셨고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구원얻은 이방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셨던 그 환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환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네모난 그릇이 하나님을 배부르게 해 드릴 하나님의 백성들로 가득 차게 하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그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변함이 없었고 또한 지금도 이루어 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 소원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배고픔은 완전히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사는 베드로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 세상을 향해서 그물을 던져 사람을 낚는 어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할 그물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편견이나 경험, 그리고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하나님의 그 위대한 꿈을 이루는 사람들로 사용하실 것이고 우리로 인하여 만족한 기쁨을 누리실 것입니다. 이미 가장 큰 장벽은 허물어 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거룩함과 속됨의 장벽이 무너졌고, 유대인과 로마인들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비하면 우리가 가진 장벽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충분히 허물 수 있고 또 허물어 져야 하는 그런 장벽들입니다. 성도들과 이야기 해 보면 잘 나가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현실이 결론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편견 때문입니다. 현실은 어떨 수 없이 현실이다라는 편견 때문입니다. 현실은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장벽을 넘어서는 순종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인해 네모난 그릇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가 없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인해 배부르실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할 때나 혹은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서 순종하려고 할 때, 오늘 주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셨던 그 환상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나에게 있는 불순종의 이유를 넘어서서 그 네모난 그릇을 순종의 열매로 가득 채우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계신 그 곳을 요나의 욥바가 아니라 베드로의 욥바로 만들어 가시며,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