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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3.23. 주일오전 - 아빠 아버지여(마가복음 68)



막1432to42 - 아빠 아버지여(마가68).pdf


20140323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4장 32-42절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도 기도를 많이 강조하고 또 기도를 많이 하기로 소문이 난 교회입니다. 교회마다 새벽기도회가 있고 또 금요기도회가 있습니다. 특별한 절기가 다가오면 특별 새벽기도회도 갖습니다. 이런 모습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는 해도 참 좋은 전통입니다.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중요한 것이며 그래서 정기적으로 또 시간을 들여서 기도드리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국 교회 성도들은 기도를 드릴 때의 열정에 있어서도 정말 대단합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부르짖어 기도드릴 때 보면 조용하던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기도가 나오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우리 광현교회 식구들도 이런 좋은 전통을 살려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기도하고 또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한국 교회에 이런 기도의 전통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감사해야 할 일이고 앞으로도 꼭 지켜가야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뜨겁게 기도 드려 온 한국교회인데 목회자들의 부패의 정도는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있고 성도들 또한 삶의 거룩과 정직에 있어서는 심각한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더 이상 기독교에 소망을 두고 있지 않죠. 저는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도의 방향과 내용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는 것 또한 커다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 중에서 기도는 가장 내면적인 작업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항상 언어를 매개로 하여 반복해서 드려지고 또 드려집니다. 이렇게 보면, 기도만큼 개인이 생각이나 가치관 그리고 그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큰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기도가 그 방향이 어그러져 있다면 그런 기도는 많이 드리면 많이 드릴수록, 또 열정적이면 열정적일수록 오히려 그 사람의 영적인 방향과 삶의 방향을 가장 심하게 비뚤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서점에 갔다가 기도에 대한 아주 직설적인 제목의 책을 한 권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눈 뜨고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책 제목이 저런가 했지만 금새 그 책의 제목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인 즉 분별력 있는 기도, 그리고 바른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그런 의미에서 눈을 감지 말고 눈을 뜨고 기도하라고 충고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자기 욕심을 합리화 하거나 자기성취를 부추기는 도구가 되면 기도 자체가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으니 그런 기도를 드리면 안된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정말 기도를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것 자체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강조 뒤에 주어지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는데 있습니다. 기도를 드리면 모두 다 들어주시니 그저 기도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기도가 좋은 기도이고  바른 기도인지 또 어떤 기도는 드리면 오히려 안되는 기도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쓰신 목사님의 주장처럼 많은 경우 기도는 눈을 감고 드리는 기도가 될 때가 많았죠. 그러다 보니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오히려 영적인 분별력은 더 어두워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고, 지금의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 속에는 그런 기도가 미친 좋지 않은 영향이 상당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눈 뜨고 기도하라’는 그 책의 저자가 주는 충고를 잘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살필 본문은 지난 주일에도 함께 살펴 보았던 본문이지만 오늘은 이 중에서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의 내용에만 집중하여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인 동시에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그런 기도라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도 되는 이유는 이 기도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장 험악한 현실 속에서 드린 지극히 현실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드리실 때, 전능하신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눈 앞에 놓고 계셨던 십자가는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능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온전한 한 인간이 짊어 져야만 하는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그 죽음이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두려워 했던 고통은 단순히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두려워 하신 고통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식으로 본다면 우리는 주님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 안중근 의사보다도 못한 분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받게 되는 고통이었습니다. 죄 없는 분이시면서, 절대로 죄와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시면서 죄를 뒤집어 쓰고 죽음이라는 죄의 형벌을 당해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고통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 성경은 예수님의 그러한 고통을 “심히 놀라고 슬퍼하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 예수님께서도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표현하실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보다 더 두려운 현실, 그리고 십자가 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보다 더 피하고 싶은 현실은 없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그 분이 피하고 싶어하셨던 단 하나의 현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러한 생생한 현실, 가장 두렵고 고통스럽고 또 슬픈 현실, 그리고 가장 피하고 싶었던 현실 앞에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도는 정말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이런 현실 앞에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들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가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고, 사람에 의지해서 해결해 보려고 할 수도 있고, 그저 무기력하게 자포자기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얘 현실 자체에 굴복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순간에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 무겁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셨습니다. 슬퍼하셨고 또 두려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거기서 주저 앉지 않으셨고 그것을 기도해야 할 이유로 삼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현실은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또한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그런데, 현실과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이나 생각에만 집착하면 현실은 결코 우리의 출발점이 되지 못합니다. 그게 결론이 되고 그게 답이 되어 버립니다. 답과 결론은 현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려워지고 힘들어 질 때, 우리의 감정과 생각은 부정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죠. 그렇지만 그 다음의 반응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계속 그런 감정과 생각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기도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진짜 답을 찾아갈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를 선택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주 짧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기도를 더 드리셨는지 모르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주님의 기도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주님이 이 기도만 드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보아도 정말 간절하고 절박할 때는 이런 저런 구구절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정말 정말 간절할 때는 그저 수 십 분 동안 주님만 찾다가 기도가 끝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가장 적절하고 또 능력있는 기도가 될 때도 많습니다. 주님은 가장 절박한 현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곰곰히 묵상해 보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고난과 고통의 순간에 정말 피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현실 앞에서 드려야 할 가장 적절하고 능력있는 기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하오니…”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계셨던 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진실로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 순간에 기도를 선택하신 이유요 또 출발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시니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확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당연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때로는 믿음이고 뭐고 챙길 겨를도 없이 그저 하나님께 울며 탄식하며 하소연 하듯이 기도할 수도 있고, 그런 기도도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시편의 기도 중에는 그런 기도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항상 믿음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그것은 내가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에게 말 그대로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시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제가 어떤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읽으신 적이 있으시지요? 여러분은 그 이야기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아멘이죠?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까요? 더 좁혀서 우리 옆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까요? 제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아지스 페르난도라는 선교사이면서 성경학자이신 분인데요. 그 분이 만난 인도 선교사 한 분이 그 분에게 자기가 섬기는 한 부족에서는 그 근래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곱 번이나 거듭해서 일어났다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부족에서 새롭게 생겨난 장례식 이전 절차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것은 일단 성도가 죽으면 금방 장례의 절차를 시작하지 않고 그 사람을 가운데 두고서 성도들이 세 시간 반 정도를 합심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장례식은 그 다음에 고인이 살아나지 않으면 그제서야 시작되게 되었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성품이 어긋나지 않고 또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이런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가능 불가능을 내가 정해 놓고 응답이 가능한 것은 기도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온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는데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 분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바램이 하나님의 생각이나 성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도드리실 때 항상 믿음부터 챙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는 그런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여러분의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드리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은 예수님 편에서 아주 정직하게 드린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당하실 고난을 ‘잔’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잔 혹은 대접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저주, 그리고 심판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피하고 싶으셨던 것이 단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저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분이셨습니다. 또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기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분이 자신에게 저주와 심판, 그리고 분노를 쏟아붓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십자가라는 ‘잔’ 만큼은 꼭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들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질병이 치료되게 해 달라고, 너무 힘든 상황이 해결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드리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은 피하고 싶은데 억지로 그것을 달라고 기도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기도의 시작은 정직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의 심정을 그대로 말씀드리고, 그 순간의 필요를 있는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이런 정직함이 없으면 우리는 진실한 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된 기도자가 아니라면 진실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기도를 잘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요. 아마도 그런 분들 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기도에 익숙하지 못한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것, 그리고 생각 속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게 기도가 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분으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는 진솔한 언어는 그것 자체로 충분히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여기서 끝나면 우리 기도는 그저 우리의 소원성취의 도구, 그리고 욕심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기가 쉽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이든 기도드릴 수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의 필요는 그 필요가 느껴지는 당시에는 굉장히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곧바로 기도의 제목으로 연결하곤 하지요. 그렇지만 그런 느껴지는 필요들 중에는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섞여 있고 또 사실 내가 가지면 절대로 안되는 것들도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이것이 기도자로서 우리가 가지는 불완전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도 우리에게 허락하실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이 답이 충격적이실 수도 있지만 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 우리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는 것을 너무 너무 원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교육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와 비슷한 것이죠.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호기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 거나 만져보고 또 입에 넣으려고 하죠. 이상하게도 아기들이 굉장히 만져보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뜨거운 물컵입니다. 아무리 말려도 자꾸 컵으로 손을 가져 갑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 될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이의 손을 가져다가 그 컵에 살짝 대 주는 것입니다. 아이는 울고 불고 난리가 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런 컵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기도가 이런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너무 너무 필요합니다. 절실하다 못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피하는 일이 그렇게 느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달라고 안 주면 안된다고, 안 주시면 나 밥 안 먹겠다고 단식투쟁하면서 고집 부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분명히 내 입장에서는 기도의 응답이고 은혜인데 이상하게도 그것 때문에 내 삶이 헝크러지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보완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필요로 부터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란 본디 나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기도는 우리의 필요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나의 소원이 결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나를 나의 필요에만 묶어 놓게 되고 그것에 휘둘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기도한대로 안 들어 주셨다고 하나님께 비치고 화를 내는 것은 다 그렇게 드리는 기도의 부작용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또한 주님의 기도처럼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로 마감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도를 결론으로 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똑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드리셨던 것을 보면 이 기도가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실 수 있는 편안한 결론이 될 때까지 긴 시간의 간구가 필요했던 것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드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드리면서도 그 기도를 통해서 자기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합니다. 욕심도 다스리지 못하고, 분노도 해결하지 못하며, 근심과 걱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에 의지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가 작동하여 욕심이 다스려 지고, 분노가 사그러지고 또 근심과 걱정이 없어질 때까지 의지적으로 끈기있게 드리는 기도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구하실 때까지 세 번의 길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기도가 더욱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세 번을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놀라고 슬퍼하며 고민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은 이제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렇게 피하고 싶어하셨던 그 십자가를 향해서 성큼 성큼 다가가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 자신의 원함이 하나님의 원함으로 자리바꿈 되는 은혜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를 통해서도 이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함이 되고, 고민이 변하여 평안이 되며, 피하던 것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응답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들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우리의 기도가 그대로 응답된다면 우리들 또한 우리를 위협하고 넘어뜨리려는 현실의 불시험 앞에서도 두려움과 근심을 넘어서서 담대하고 당당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기도의 은혜와 능력을 꼭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기 위해서는 이 기도 전에 꼭 붙들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라는 진리입니다. 아빠라는 말은 우리 말의 아빠와 비슷한 말이면서도 조금 다른 말입니다. 이 아빠라는 말 속에는 내가 그렇게 부르는 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확신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를 향한 가장 따뜻한 친밀함과 깊은 신뢰까지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쉽게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다를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기우와 편견에 불과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하나님은 저기 먼 하늘에서 그저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는 감정 없는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온 천하보다도 더 사랑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유익만을 생각하시는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기도하셨던 그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이심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고 또 신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아빠 아버지 되어 주심을 믿는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가장 따뜻한 친밀함과 가장 깊은 신뢰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기도자 자신을 바꿔 놓습니다. 더 든든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으로, 더 확고한 평안과 담대함을 지닌 사람으로 바꿔 놓습니다. 보이고 느껴지는 현실을 넘어서서 선하신 아빠 아버지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승리자가 되게 해 줍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사실만큼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항상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대한 확신 가운데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도는 참으로 능력있는 기도가 됩니다. 내 안의 욕심을 처리하며, 죄악을 이기고, 또 모든 현실의 절박함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가져다 주며,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에 순종할 수 있게 해 주는 진실로 능력있는 기도가 됩니다.  기도드리실 때마다 하나님을 내가 가장 기뻐하고 사랑하며 또 신뢰하는 아빠 아버지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찾는 불완전한 것들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하고 완전한 것들로 채워져 가는 삶,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아빠 아버지”로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나의 기도가 내가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깊게 신뢰하는 아버지께 드리는 언어가 되게 해 주소서. 

보이는 상황의 어려움이나 악함이 아니라 그 뒤에 계시는 전능하신 아버지를 바라보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