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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17. 새벽예배 - 이에 성소 휘장이 둘이 되니라(사순절 7-4)


21. 막1534to41 - 이에 성소 휘장이 둘이 되니라.pdf


20140617D (#1).mp3.zip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5장 38-41절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마자 멀쩡하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좌악하고 찢어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성소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짠 후 그 위에 그룹들을 수놓은 그런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룹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성전휘장 자체가 그 뒤에 있는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타나내 보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휘장 뒤의 장소, 그러니까 지성소에는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그 해의 대제사장 말고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더욱 더 분명해 집니다. 그런 점에서 지성소는 죄인들에게는 완전히 닫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거룩하게 구별한 단 한 사람만이 일년에 단 한 번 예외적인 허락을 받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속죄일의 제사가 실패로 끝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성소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제사가 받아 들여져야 비로소 대속죄일의 제사가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은혜가 베풀어 지는 자리라는 의미의 시은좌 그리고 죄가 용서되는 장소라는 의미의 속죄소라고 불리는 법궤의 뚜껑이 있었습니다. 이 뚜껑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과 은혜가 흘러나옴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없다면 은혜도 용서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야만 합니다. 이런 진퇴양란을 해결할 방법은 제사를 통해 잠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일이 일년에 단 한 차례 허용되고, 그것을 통해서 일년 동안의 속죄와 은혜가 허락되는 곳이 바로 지성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만 결코 그 은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 나아가서 모든 인간들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성소의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좌악 찢어집니다. 그래서,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둘 사이의 구분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은좌, 속죄소, 은혜와 죄용서가 이루어지는 그 거룩한 곳이 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지성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날 벌어진 일은 그런 일과 정확하게 반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대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역이 무너지면 그 성역이 더럽혀 지고 나서 세상과 뒤섞여 버리고 맙니다. 마치 국립공원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공개해 놓으면 자연이 더럽혀지고 망가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역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개방되었을 때, 그 곳 자체의 고유한 의미와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런 곳들이 가지고 있는 구별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것들의 특징은 자기도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스스로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만나면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깨끗한 것이 더럽혀 지고 맙니다. 그것이 상대적인 것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지성소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지성소의 거룩함은 다른 것을 거룩하게 만들 지언정 자신이 부정해 지지 않습니다. 지성소가 수천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은혜를 흘려 보내면서도 결코 자기 자신은 부정해지거나 그런 은혜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 그 지성소가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제 지성소는 다른 곳들과 구별된 장소로서의 의미는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신에 언제 어느 곳으로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흘려보내서 그 곳을 은혜와 용서가 있는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누구에게라도 용서와 은혜를 부어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군의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바깥 해골언덕이었습니다. 가장 부정한 곳, 죽음과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백부장은 그런 곳에 서 있는 완전한 이방인입니다. 장소도 그렇지만 그 백부장 또한 이전 같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서 있던 그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켜보고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 사람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정말 완벽한 신앙고백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성소에 있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부정한 저주의 자리에 있었던 이방인, 그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로마군인의 장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성소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시은소와 속죄소가 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은혜의 광채는 순식간에 골고다 언덕까지 비춰 주었습니다. 그 어떤 저주의 장소에 있는 그 어떤 부정한 사람일지라도 그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가 백부장을 비추어서 역사상 가장 처음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기대하지 못할 시간이나 장소는 없습니다. 이미 성소 휘장이 찢어졌고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되었고, 그 어떤 시간도 거룩한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영적으로 본다면 역사상 가장 복된 시대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영적인 황금기를 살아가는 가장 복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든 하나님의 죄 용서를 구하고 또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해서 다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절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성소 휘장이 찢어졌을 때가 바로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셨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아서 고통으로 절규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다행히 요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그 외침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일의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소명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명이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요, 마지막 대제사장으로서 모든 죄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끝장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그 모든 일은 완성되었습니다.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이 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지성소는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느 순간 어느 곳도 모두 지성소가 될 수 있었고,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참 믿음만 있다면 은혜를 기대하며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죄 용서를 받고 다함 없는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가와 전혀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시고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의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선물로 받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룬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았으며, 이룬 것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과 필요한 은혜가 쏟아부어지는 통로가 예수님 덕분에 우리를 향하여 열렸으니 우리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자꾸 다 이루신 일에 무언가를 더해서 그것을 더 단단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교만이고 그것이 바로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놓치게 하는 일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불안해 지고 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자신을 자책하게 될 때마다 “다 이루었다”라는 주님의 승리의 외침을 마음 속에 그리시면서 그저 의지하시고 구하셔서 있는 그 곳을 다시 지성소로 만들어 가는 은혜 안에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