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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4.18. 새벽예배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사순절 7-5)



22. 막1542to47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pdf


20140418D (#1).mp3.zip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5장 42-47절




우리는 살면서 이런 저런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선택들 중에는 좋은 선택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선택들도 있습니다. 또 사람이 볼 때에는 지혜롭고 좋은 선택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선택들도 있고, 정반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지혜롭고 가치 있는 선택인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또 저렇게 이런 기준과 저런 기준을 가지고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그 모든 선택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두 그리고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또 그런 선택들이 하나님과 세상에 어떤 의미를 줄 지 그것 또한 예측하기 힘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발걸음의 방향을 선택하면서 걷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은 안식일 전 날, 그러니까 금요일 정확하게는 오후 세시쯤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지 않았고 벌써 해질녘이 다 되었습니다. 어제 본문을 보면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많은 여인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들이 여인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대담하게도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원래 죄수들이 십자가에 달리면 적어도 한 나절, 길게는 3일씩 살아있기도 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벌써 죽었을까를 의심하고는 형 집행을 담당했던 그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님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예수님의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장사지내기 위해서 고운 모시천을 구입해서는 그 세마포로 예수님을 싸서 아마도 자신이 쓰려고 미리 구입해 놓은 바위 속을 파서 만든 무덤에 안장한 후에 커다란 돌을 굴려서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저는 이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을 대담하다고 표현했지만 성경은 당돌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서 장사를 지내는 일은 그만큼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용기를 냈고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고 당돌해 보이는 일을 결행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 일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그렇게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먼저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게 야당이건 여당이건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슨 사안이건 당에 따라서 100퍼센트 찬성과 100퍼센트 반대만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한 정당에는 한 가지 의견만 있고 모두들 거기 동의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 모두 머리가 있는 사람들인데 어찌 그렇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당원들이 100퍼센트 어떤 사안에 찬성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기 생각이나 주관, 그리고 양심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 가운데서의 자기의 입지를 생각하니 아무런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적어도 자기 소속 정당 전체가 그렇다고 해도 자기 만큼은 소신대로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는 정치가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당시 이스라엘을 모든 면에서 장악하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원 70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그가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가 그만큼 위치가 있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정도 사람이라면 자기 개인의 소견보다는 자기 입장이나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의 유익에 따라서 움직이기가 더 쉽습니다. 그게 옳던 그르던 말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야 말로 자신의 소신대로 움직였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을 누가복음 23장에서 찾아보면 거기서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는 다른 공회원 모두가 예수님을 모함해서 죽이려고 할 때, 그들의 모의와 결행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설명이 하나 더 나오는데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은 그가 숨어있던 예수님의 제자였다고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물론 그의 위치 때문에 처음부터 그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오히려 공회의 예수님에 대한 음모와 악한 행동들이 진행되어 가면서 점점 더 올바른 쪽으로 움직여 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서는 자기 태도를 확실하게 정합니다. 자신의 모든 입장이나 이익을 내려놓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 로마 쪽에서 보면 정치범이고 유대인들 쪽에서 보면 신성모독죄를 저지르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스런 죽음을 죽은 그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주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움직여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입니다. 제자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인정받고 존경받을 때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 줄 것처럼 설쳐 댔지만 지금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그 십자가 근처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습니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가진 것이 많아서 드러내 놓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밝히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실 가장 위험하고 또 불리할 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가장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서 자기 무덤에 정성스럽게 장사를 지낸 것입니다. 뒷 일을 생각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리석어 보이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일은 예수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예언을 성취한 그런 일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잘 아시다시피 메시야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구약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은 바로 그 예언을 성취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어기지 않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 예언을 이루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중의 일이지만 이 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학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설명할 때, 그 당시 예수님의 무덤의 모습을 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을 볼 때, 아리마대 요셉의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요셉이 이것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행동은 그런 역할을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개인적인 올바름과 선함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과 정반대편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 또한 자신이 메시야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이루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을 통해 절대로 이루어지게 해서는 안되는 예언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이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는 선택들이 처음부터 거창한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대단한 역할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로서는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더 많죠. 그러나, 우리가 아리마대 요셉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의 하나 하나의 행동은 때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만큼 하늘나라를 위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그 일이 나중에 어떻게 사용될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바른 것을 선택하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악하고 부정직한 선택을 통해서는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커다란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맡겨진 역할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선하게 이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몰라도 가치가 잘 느껴지지 않아도 맡겨신 삶 속에서, 또 역할 속에서 바른 마음과 양심을 따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헤아리며 거기 따라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하나의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이 될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 역사의 아름다운 한 줄로 기록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아름답고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