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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6.18. 새벽예배 -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창세기 162)



창5001to14 -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창162).pdf


20140618D (#1).mp3.zip





본   문 : 창세기 50장 01-14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야곱의 장례식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한 사람의 장례식 중에서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브라함의 장례 이야기도 야곱의 장례식 보다는 훨씬 짧습니다. 그만큼 창세기가 야곱의 삶과 죽음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야곱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비중있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훌륭했거나 신앙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펴보아 왔듯이 야곱의 삶은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평균 이하의 삶이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나 인격적인 면에서나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야곱의 삶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삶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붙여주신 그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되었고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야곱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좀 더 훌륭한 사람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세우시지 어떻게 이런 인물을 선택하셨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실은 그래서 야곱은 오히려 은혜란 무엇이며 또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뱃 속에 있는 쌍둥이 중에서 첫째가 아니라 둘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보인 기질이나 성품도 야곱보다는 오히려 에서가 훨씬 더 좋았지만 끝까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에게 일방적인 약속과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는 거의 일평생을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주셨던 약속, 그리고 다시 그에게 반복해서 주신 약속을 그를 통해서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은 그의 자녀들로 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이상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며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들도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읽다가 보면 정말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그렇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이야 말로 도대체 신앙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에는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우리가 신실하고 우리가 선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충실해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야곱 만큼은, 그리고 이스라엘 만큼은 아니어도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행하지 못했고 신실한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불순종하고 또 얼마나 많이 탈선했는지 모릅니다. 행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되는 생각과 마음이 우리를 신앙에서 떠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새벽에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야곱인 줄 아시면서도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가 야곱처럼 생각하고 느끼며 또 살아갈 때에도 우리를 그 손에 붙드시고 우리를 향한 신실하심을 거두어 들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비록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 그리고 인내함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더라도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덕분에, 아니 오직 그것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실패되지 않는 이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구원을 붙들고 계시고 또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들리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흔들림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고 또 확실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장례식 장면인데요. 정말 어마 어마합니다. 팔레스타인 안 구석에서 이름도 없이 그 당시로는 정말 섬기는 이 한 사람 없는 하나님을 섬기던 촌부의 장례식이라고는 절대로 믿어지지 않죠. 우선 요셉은 의원들을 시켜서 아버지 요셉의 시신을 향료로 처리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애굽의 풍습이었지만 그 더운 날씨에 가나안 땅까지 먼 길을 가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에는 40일이 걸렸습니다. 통상 애굽 사람들이 사람의 시신의 방부처리를 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40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죽음 앞에서 애굽 사람들이 70일 동안을 곡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니까 야곱의 시신의 방부처리를 했던 40일과 여기에 더해서 30일을 더 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반인들이 죽으면 40일 동안만 곡을 했습니다. 70일 동안 곡하는 것은 왕족들이 죽은 경우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애굽사람들은, 비로 그것이 요셉 때문이기는 했겠지만 야곱을 거의 왕족으로 대우해 주었던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왕이나 다른 귀족들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장례행렬에 대한 소개도 정말 엄청납니다. 7절을 보면 그 행렬에는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이들을 수행하는 수행원들과 원래 장례 행렬, 그리고 야곱의 모든 가족들이 동행했기 때문에 그 행렬은 그야 말로 성경의 표현대로 심히 컸습니다. 아닷이 이르러서 이들이 칠일 동안 곡을 하였는데, 그 곡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가나안 거민들은 아얘 그 곳을 ‘아벨미스라임’ 그러니까 애굽의 큰 애통이라고 부르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런 장례식은 뭔가 대단한 사람의 장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나안 땅 한 구석에,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강하고 큰 족속들의 틈에 끼어서 겨우 겨우 살다가 애굽으로 건너갔던 촌부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 촌부의 장례식에 온 애굽의 권력자들이 총동원 되었고 그들은 그를 위해서 왕에게나 적용됨직한 애도를 표시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어쩌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본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또 얼마나 풍성하고 변함없는지 그리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야곱의 인생과 특히 그의 장례는 그런 것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특별하게 선택된 도구인 셈이지요.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실하시고 능력있는 손으로 우리 모두를 붙들고 계십니다. 바로 그 손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고 계시고, 또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그 분  안에서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야곱같아질 필요는 없겠지만, 문득 문득 우리 안에서 야곱같은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그래도 우리를 은혜와 능력의 손으로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어 믿음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다시 우리를 세우실 것이며 그런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