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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7.06. 주일오전 - 보리추수 시작할 때에(룻기 3)



룻0119to0213 -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룻3).pdf


20140706SM (#1).mp3.zip





설교본문 : 룻기 1장 19-1장 13절




오늘은 2014년도의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은 글자 그대로 옛 이스라엘이 보리추수를 감사하면서 지킨 절기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 게다가 농사를 짓지도 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 맥추절은 별로 의미없게 여겨지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왜 오늘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농사도 짓지 않는 우리가 추수하는 것도 없으면서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맥추절은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이후에 40년 만에 처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추수한 것이 바로 보리였는데 이것을 감사하면서 지켰던 절기가 바로 맥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를 초실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맥추절이 한 해의 첫번째 열매를 거두는 절기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가나안 땅에서 처음 추수한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절기는 유월절 이후 50일만에 찾아온다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절기는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 보면 항상 7월 첫째 주일이 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한 해의 딱 절반을 보내고 남은 절반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지키게 되는데요. 그래서 이 절기는 우리에게 지나간 반 년을 감사하면서 다가오는 남은 반 년을 믿음으로 준비하는 절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맥추절이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특별히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이 날이 바로 오순절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순절이 어떤 날이죠? 바로 우리가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부르는 곳에 성령님께서 처음으로 충만하게 임재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맥추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기도 하는데요, 바로 이것 때문에 맥추절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도 오히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절기가 됩니다. 


구약의 절기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절기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맥추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맥추절을 어떻게 성취하셨을까요?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영이시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자녀와 진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처음으로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날은 처음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탄생하는 뜻깊은  날이었죠. 그래서 이 날은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처음으로 하늘 곳간에 추수해 들인 하나님의 맥추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은 우리에게 누가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지, 누가 하늘 곳간의 알곡들인지를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고 또 그렇게 살아가게 해 주는 성령님의 충만하신 임재를 다시 한 번 소망하게 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2014년도의 맥추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들로 회복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늘 곳간을 채우는 하나님의 충실한 알곡들로 거듭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나오미를 보고 이웃들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알던 그 나오미가 맞는가? 정말 그 사람인가?” 그런데, 그렇게 비참해져 버린 자신의 신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나오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대답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나를 마라라 부르라”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알던 이웃들이 자기를 기쁨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조차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차라리 자신을 괴로움이라고 고통이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에게는 그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나오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자신을 괴롭혔다고 그래서 자신은 풍족하게 나갔다가 이렇게 텅 비어서 돌아오게 되었다고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만큼 나오미의 심정은 괴롭고 비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왔던 때는 공교롭게도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동안 아주 오랫동안을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들레헴에는 떡이 전혀 없었습니다. 배고프고 가난한 이웃들은 커녕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 조차도 떡집에서 떡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었던 떡집에 드디어 보리떡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베들레헴에 풍년이 찾아왔고 바로 그 때 나오미는 텅 비어버린 자기 인생을 짊어지고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겉사람은 모압여인이었지만 이미 속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있었던 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시려고 만들어 놓은 율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율법은 신명기 24장 1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추수 때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법이었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잃어버렸거든 다기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과부를 위해서 남겨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토록 딱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것을 법으로 정하는 나라나 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법이 어디있습니까? 추수하는 사람에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싹싹 긁어서 거둬가지 말라고 명령하는 그런 신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런 명령까지 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단순한 종교나 신앙의 계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담아 놓은 최고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 그러니까 헤세드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 이상의 헤프고 풍성한 사랑을 베푸시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항해 그런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런 법을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그럴만한 선한 마음이 충분치 못하고 그만큼의 사랑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지킴으로써 서로에게 차고 넘치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룻은 이 아름다운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군가는 이 법을 지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헤세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헤세드를 흉내내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하면서 떨어지는 이삭이라도 주워보려고 집을 나섭니다. 다행히 당시의 베들레헴에는 아직도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하루 종일 이삭을 줍는데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막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그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당시 상황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해의 보리 추수는 얼마나 오랜만에 찾아온 것입니까? 그리고 그 땅은 얼마나 오랫동안 기근에 시달렸습니까? 그렇다면 그 곡식 한 알 한 알이 얼마나 귀하고 또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귀한 곡식들을 동족도 아닌 이방여인이 주워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 때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서 자기 멋대로 자기만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사들의 시대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헤세드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룻이 우연히 이삭을 줍게 된 곳은 그 지역의 유력자였던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교롭게도 엘리멜렉과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룻이 그 밭에서 이삭을 줍기 시작했을 때는 아직 보아스가 밭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종들과 일꾼들만이 추수를 하고 있을 때였죠. 그런데도 그 사람들 중에는 룻을 가로막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는 무역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식당에 가거나 가게에 가면 손님들과 종업원들을 유심히 살피게 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손님이 만족해 하는 곳은 여지 없이 종업원이 밝고 친절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은 또한 거의 예외 없이 주인이 밝고 친절하고 후한 곳입니다. 주인이 까탈스럽고 인색한 가게 치고 종업원들의 서비스가 좋은 곳이 없고, 거기서 정말 행복하게 물건을 사거나 식사를 하는 손님들 또한 거의 없습니다. 그런 곳이 장사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저도 그런 곳에는 될 수 있는대로 다시 가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보아스의 종과 그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이방인 여인이 홀로 이삭을 줍고 있는데도 그를 방해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합니다. 만약 보아스가 인색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들에게 모질게 대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테니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ㅇ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박하게 대하지 마시고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서 선하고 너그럽게 대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 속에도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삶의 자리는 그 날 보리추수를 하는 보아스의 보리밭처럼 넉넉하게 되어져 갈 것입니다. 


보아스는 느지막히 밭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먼저 일꾼들과 종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일꾼들도 화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성도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 젊잖고 복된 말들은 종과 주인, 그리고 일꾼과 고용주 사이의 대화입니다. 게다가 가만히 보면 누가 누구에게 먼저 축복하며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까? 종이 아닙니다. 일꾼들도 아닙니다. 주인이, 그리고 고용주가 먼저 그런 종과 일꾼들을 향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복빌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인사와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똑같은 축복으로 되돌려 줍니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꼭 여러분 주변을 이런 관계가 있는 곳, 이런 복된 인사가 있는 자리로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고성과 언성, 짜증과 오해가 아닌 이렇게 따뜻하고 진심어린 축복의 말들이 오고 가는 곳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먼저 움직여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높으니 네가 낮으니 하지 마시고 보아스처럼 먼저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아스의 눈에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대번에 그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긴가 민가 하면서 사환에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환이 대답합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서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보아스는 이 이야기를 듣고 룻을 불러 자기가 다른 남자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해 놓았으니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여기서 이삭을 줍고 목이 마르거든 하인들이 길어온 물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룻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 그것도 여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꼭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던졌던 질문 같습니다. 보아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이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의 대답인 즉,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네가 너의 시어머니에게 베푼 그 헤픈 사랑, 그러니까 헤세드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에게 주었던 헤세드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룻에게 자신의 헤세드로 갚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룻이 나오미에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보아스가 룻에게 그렇게 해 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에게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룻이 나오미에게 필요이상의 헤픈 사랑을 주었듯이 자신도 보아스에게 그렇게 해 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셨나이다.” 이러한 보아스의 헤세드는 그 동안 룻이 남몰래 품고 있었던 아픔과 설움을 일순간에 치유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고 또 알아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룻은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던 것입니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아직도 힐링이라는 말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것도 힐링, 저 것도 힐링… 어쩌면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상처와 아픔이 많고 또 그래서 치유가 많이 필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진정으로 치유되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누구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진심 어린 작은 친절을 나누어 줄 때 그럴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참된 치유를 누리게 됩니다. 저는 종종 우리들 안에서 다른 지체들이 베푸는 사랑을 보고 또 그 유익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너무나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모습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분이 무언가를 바라고서 그런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마도 룻이 나오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분은 그러는 줄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누군가가 그 분의 사랑을 알아주고 또 다른 사랑으로 보답해 주는 일들이 점점 늘어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 일이 되겠습니까? 룻과 보아스 사이에 있었던 이 일이 두 사람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아름다운 일이라면 이 일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발견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우리 교회가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우선 보아스를 흉내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 보시고 우리를 위해서 헤세드를 주는 사람이 있거든 꼭 찾아 가셔서 넌지시 사탕 하나라도 손에 쥐어 주시면서 ‘당신 때문에 기쁘고 행복합니다!’라고 진심어린 한 마디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또 다른 일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여러분이 받은 헤세드를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치유하고 또 치유받는 행복한 지체들이 될 것입니다. 


룻기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더 큰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이유는 이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헤세드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특별한 한 절기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절기는 바로 보리를 추수하는 절기, 그러니까 맥추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과연 맥추절이란 어떤 절기가 되어질 때 가장 맥추절 다워지는가를 보여주는 성경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맥추절에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가 이루어짐으로써 맥추절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알곡이 된 우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아니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 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요한 메세지를  헤세드를 알고 또 서로에게 헤세드를 줄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녹여 놓으신 것입니다. 


오순절, 그러니까 맥추절에 추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의 한 작은 집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알곡들을 추수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이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요. 2장 44절 이하를 보면 그렇게 천국의 알곡들로 거둬들여진 성도들이 모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성경이 성령님께서 첫번째로 추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덧붙여 주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어디를 들쳐 보더라도 참된 성도들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맥추절을 지키는 오늘, 하나님께서 헤세드가 가득 담긴 룻기,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을 함께 읽고 묵상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특별한 사랑이요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지니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하나님 나라의 알곡인 우리들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성령의 가장 귀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맥추절은 성령님의 절기이고 그래서 사랑의 절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닮은 열매들을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맥추절에는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헤세드라는 사랑을 기준으로 우리의 지난 6개월 동안 맺은 열매들을 돌아보며 남은 6개월 동안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준비를 했으면 합니다. 내가 그 동안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헤프게 사랑했는지, 얼마나 친절하게 사랑했는지 돌아보고 아직 덜찬 신앙의 속살을 채우기 시작하는 첫 시간이 되게 한다면 이번 맥추절은 정말 유익하고 영광스러운 맥추절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6개월은 우리 사이에서 부터 하나님의 헤세드를 닮은 룻과 보아스의 헤세드를 흉내내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다른 성도들에게서 그런 사랑을 보면 알아주며 감사하고, 나는 또 다른 곳에서 그 지체를 또 다른 헤픈 사랑으로 사랑하며 그렇게 살기 시작하는 그런 6개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런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성도들이 될 것이고 말입니다. 


나머지 6개월은 다른 성도들과 나의 이웃들을 위해서 넉넉히 낱알들을 흘려두는 헤픈 사랑을 하며 성령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가는 그런 남은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